I'm so fxxking grateful for my ex
너는 참 별로였어.
아, 혹시나 이 글 보면 착각은 하지 말고.
그런 너를 굳이 기록해두는 건, 다시는 너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야.
나는 유독 관심 보이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많이 생기더라.
정작 나 자신이 인터넷이나 데이팅 앱으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은 잘 안 하는데 말이야.
너 역시 그랬다. 지인의 네트워크로 처음 알게 된 너는 관심사가 비슷했다.
메이크업에 관심을 지니기 시작했고, 간헐적 채식을 하고 있었으며, 가끔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썼다.
나와 너의 네트워크가 겹친 것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를 통해서였다.
내가 남자들에게 겪는 아이러니가 있다. 첫인상은 포스가 쎄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도 잘 안 해서 다들 기죽는데, 누군가와 아이스 브레이킹 해야 할 때는 누구보다 친절하거든. 영 안 친절할 거 같은 애가 친절하니까 다들 착각하거나 호감을 가지거나 둘 중에 하나더라고. 대학교 2학년 때 수업 같이 듣던 남자 동기 프로필 사진 보고 웃겨서 선톡 했다가, 자기 여자 친구 생겼다고 김칫국 1톤 마시는 거 보고 그날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얘.
대신 다들 간과하는 건, 아이스 브레이킹 단계가 아니라
정말로 누군가의 친구가 되기까지는 마음을 여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타입이라는 점.
너는 다행히 착각하지는 않았다. 대신 호감을 조금 티 내기는 했다. 내가 아는 냉면집 이야기를 할 때 ‘소개팅하기 좋을 것 같다’는 말에 움찔했고, 먼저 연락을 하고는 했다.
정작 오프라인으로 만나자는 제안은 별생각 없던 내가 했다.
너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연애에 있어 내가 좋아하는 타입과 나를 좋아해 주는 타입이 항상 극과 극이었다. 너는 닮았다는 소리를 들은 연예인이 송중기와 기성용이라고 은근히 뽐냈지만, 미안하게도 내 타입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무해해 보이고 귀엽고 예쁘장한 남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안 좋아해. 칼 정장이 잘 어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퇴폐적인 남성상을 좋아해. 살면서 가장 오래 좋아한 배우가 제임스 맥어보이와 김남길이면 말 다 했지.
그래도 노력은 해보았다. 지금까지도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말인데, “여자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다”는 말이 나에게 맞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노력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감정 널뛰기를 할지 몰라도 행복한 순간이 존재했지만,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주로 감정의 사막을 함께 걸을 뿐이었다. 감정의 사막을 걸을 것이라면 차라리 혼자 걷고 싶었다. 그럼에도 너에게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너와의 만남이 순탄치는 못했다. 추운 겨울에 나는 얼음에 미끄러졌고, 대화는 잘 끊어졌으며, 그 날 연어 덮밥을 먹은 나는 집에 와서 체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노오력하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그래도, 더 좋아한다는 걸 알면 자존심은 잘 안 내세우게 되던데.
직접적으로 만나자는 이야기는 안 하면서 그날 시간 된다는 이야기는 흘리는 너가 껄끄러웠다.
애초에 그 기간에 시간도 안 됐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어려운 질문들.
그러고 나서 자존심 상한 티를 내는 것도 싫었어.
알고 있었다. 너와 나는 잘 맞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언더 힙합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여자인 내 앞에서 페미니즘 이야기를 꺼내며 힙합을 잘 듣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지.
너는 너와 비슷한 외모의 남자 아이돌들을 좋아하면서, 키 큰 남자를 보면 위압감이 든다고 했다.
너에게 너의 사상과 외모와 글은 도구일 뿐이었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도구.
너 같은 사람을 그냥 넘어가서 다행이야.
나를 동경하면서 처음부터 기대려고 하는 사람을 넘어가서 다행이야.
나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멋대로 기대하고 원하는 사람을 넘어가서 다행이야.
자신의 감정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부터 내세우는 사람을 넘어가서 다행이야.
누군가에게는 삶이고 투쟁인 것을 약점을 감추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을 넘어가서 다행이야.
자존심 내세울 거면 다시 연락하려고 하거나 들킬 염탐은 하지를 말지.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냥 스쳐 지나가 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그럴수록 내가 원하는 사람은 뚜렷해졌으니까.
쓸데없는 밀당하지 않고 돌직구로 담백하게 표현하는 사람을 원해.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을 원해.
밤이 새도록 나와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해.
나를 존경하면서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해.
나의 사소한 점이라도 포착해서 칭찬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해.
그런 사람을 못 만날 바에는, 그냥 친구들과 쉐어하우스에서 살다가 강아지 키우고 독신 입양하지 뭐.
그런 사람이 있긴 하냐고?
그런 사람 기다리다가 인생 끝나지 않겠냐고?
글쎄. 그 얘긴 다음에 한번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