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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

세상에서 제일 쉽지 않은 일

by 유녕
이럴 거면 왜 여기까지 오게 했어요


요즘 내 기분


가끔 후회를 한다.

그냥 아빠 말 듣고 좋은 말과 경제적 서포트가 따를 때 대학원을 가버릴 걸 그랬나.


올해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으로 운 좋게 학부생 신분만은 유지하면서 취준생이 된 지도 대충 반년이 넘었다. 그냥 취업 준비도 힘든데 예전부터 바늘구멍이었다는 언론고시를 준비하게 되었으니 더더욱 현타가 오고 짜증 날 수밖에. 특이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도 성격이 안 좋다는 소리는 거의 들은 적이 없는데, 취업 준비 과정이 성격 파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와우.


‘남들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말을 가끔 듣고는 한다. 그래도 졸업 요건 마치자마자 인턴도 하고, 그래도 지상파 공채 필기도 빨리 붙은 편이잖아. 거기까지만 된 게 문제예요. 면접 갈 때마다 부딪히는 벽 때문에 몇 주 전에도, 바로 어제도 현타가 거하게 왔다.


대부분 면접에서 받는 피드백은 이랬다.


“너의 문제의식이나 소재 선정이나 글들은 참 좋아. 그런데 영상 관련 경험이 없는 게 아쉬워.”


유병재는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 짤은 길이길이 쓰리라.


아- 네.


대학 다니는 내내 안일하게 대학원 생각만 하다가 졸업반 되어서야 겨우 PD가 될 결심을 했네요.

덕분에 남들 다하는 교내 방송국이나 영상 동아리도 못 해보고 졸업 요건이 채워져 버렸습니다.

6개월 드라마 기획 인턴을 해도 직접적인 영상 기획, 연출 ‘경험’이 없어서 문제군요.

제가 내세울 것이라고는 교지 경험, 브런치, 기획 인턴, 카드 뉴스 경력 정도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모두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되는 글 솜씨 밖에 없어서 매우 죄송합니다.

단순히 경험 부족 때문에 떨어진 것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계속되는 면접에서 이런 뉘앙스가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도대체 경력직 면접도 아니고 신입 공채와 인턴 면접에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죄송합니다.


오-버 스펙의 시대니까요. 그렇죠?


나도 언젠가는 다시 따뜻해지고 싶은데


하루하루 성격이 파탄 나는 나날이지만, 그래도 마음을 따뜻하게 한 사람들이 생각난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아직도 학교 교지 편집실을 사용할 때가 있다. 편집실 안에서 할 일을 하다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더니, 4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분이 계셨다. 알고 보니 학교 교지의 대선배셨다. 무려 20년 전 편집위원.


명함을 주셨다. 누구나 들으면 알 법한 곳의 기자셨다. 지금도 그때 교지를 함께한 동기들과 술자리를 가진다며, 홈커밍데이를 먼저 제안하셨다. 지금도 활동하는 편집위원 친구들은 안 그래도 홈커밍데이를 생각하고 있었다며 좋아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여유와 온정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가능하지만 더 넓게 말이야.

그러려면 우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데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쓸모를 먼저 증명해야 한다는 게 참 어렵지 않아?


탁한 공기에 뒤섞이지 마



요즘 고3 때 듣던 노래들을 자주 듣게 된다. 완전히 상황이 똑같지는 않아도 그 노래에 의지했던 기억들이 생각나서 더 듣게 되는 것 같다. 너무나 사랑하는 프라이머리와 이센스의 <독>. 그리고 대학 생활을 할 때는 잘 듣지 않다가 며칠 전에 갑자기 생각난 팔로알토와 빈지노의 <가뭄>. 지금은 두 래퍼 모두 열렬한 팬은 아니지만, 추억의 힘은 강력하다. 가사의 힘도 여전하고.


다시 내 삶의 가뭄을 뚫게 해 줘.


망가진 마음 슬픔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달라진 나
우유부단해진 판단력땜에 갈팡질팡
열정의 가뭄, 목마름 결국엔 갈라진 땅
못할 거 없다는 자신감 그건 자만일까?
나만의 착각일까?
어두운 창작의 밤을 더 까맣게 칠했고 상황은 나빠진다
술 취한 망나니같이 심박수가 빨라진다
침착해 속단하진 마
모든 건 때가 있는 법 위험한 도박판에 어리석게
매 달리는 건 내 방식이 아냐
왜 이리 잿밥에 관심이 많아 증오란 덫에 걸려 괜히 다치지 말아
외로운 싸움, 누구 아닌 내 귀에 내가 외치는 말
닳아버린 믿음은 배신의 칼처럼 등 뒤에서 위협해
스스로 헤치진 마 다시 오른손에 굳게 쥐는 mic

용기를 내고 숨을 내쉬어
이 뜨거운 땀이 널 위로해
널 위로해

절대로 쉽게 무너지지 마
탁한 공기에 뒤섞이지 마


팔로알토 - <가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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