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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야 Jan 27. 2023

40대 워킹맘의 인생 고민

남은 절반의 인생은 다르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있고,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취업준비, 결혼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않길. 의미와 무의미와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게 되길 바랍니다."

- 허준이, 2022년 8월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에서


프린스턴대학교 허준이 교수가 지난해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남긴 축사가 그의 필즈상 수상 이후 다시 한번 큰 화제가 되었었다. 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대부분 막 20대 중반이 된 청년들에게 남기는 그 말이 그들보다 약 두 배를 더 산 나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었는데 그야말로 그럴듯한 어느 병원의 1인실에서 남은 노후를 보내기 위한 매일의 반복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섬뜩했기 때문이다.


4년 전 딸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남은 육아휴직을 쓰게 되었고, 아직 저학년인 아이를 혼자 두게 할 수는 없어 2학년 때는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며 바통터치를 할 예정이었는데 마침 그 해 부부 동시 육아휴직 제도가 생긴다고 하여 일정 기간 휴직을 겹쳐 사용하면서 딸아이와 함께 3개월 간의 유럽여행을 계획한 적이 있다.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서로의 육휴 기간이 2학년 시작과 동시에 학기중일 때만 가능하게 되어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수업일수와 장기 결석 등에 관해 꼼꼼하게 알아봐 주시기까지 했지만 결국 우리는 떠날 수 없었는데 바로 코로나19 때문이었다. (항공권과 호텔 등 예약 내역이 모두 당사자의 의견과 상관없이 자동으로 취소가 되어버리는 경험을 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을 흘려보내고 나니 딸아이는 훌쩍 커버렸고 우리 부부 역시 나이만 먹은 채 매일의 반복 속에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매일의 반복 속에는 딸을 키우면서 느끼는 아주 큰 행복과 우리 가족과 각자의 소소한 행복도 포함되어 있지만 남은 인생을 계속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물음에는 쉽게 '그래도 좋다'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회사 생활에서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에 큰 행복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라는 점이 서로 비슷한데 '나의 일'과 '회사의 일'은 결이 다르며, 나의 일은 나의 브랜드로 증명할 때 좀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라 정년퇴직까지 회사를 다니는 것에 항상 고민과 의문을 품고 있다. 하지만 경제 위기가 세계를 흔들고 있는 지금 가장 안전한 곳은 회사라는 생각에도 변함은 없는데 코로나19나 경제 위기 같은 우리가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이 문제들로 앞으로의 인생을 섣불리 계획할 수 없는 이 시점이 요즘 부쩍 괴롭기만 하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일부 포기하면 좀 더 여유롭고 나른한 인생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인데 예를 들면 지방 어느 작은 마을에서 맛있는 삼시 세끼를 지어먹으면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자연과 함께 산다던가(이것은 남편이 원하는 삶 중 하나이다.) 하는 것인데, 이제 곧 중학생, 고등학생이 될 아이를 생각하면 실제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학업에 정진해야 하는 아이를 육아하고 있는 이 현실이 지금 우리 부부를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게 붙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얼마 전 내가 챙겨보는 몇 안 되는 TV 프로그램인 알쓸인잡에 나온 헤어질 결심의 정서경 작가가 이렇게 말했다. "40대 중반 나이의 특징 중 하나가 이제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삶을 세우는 나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다시 세우는 삶은 이전까지의 삶에서 잃어버렸던 자아를 다시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정확하게 나의 고민을 꿰뚫고 있는 것 같은 정서경 작가의 말에 허준이 교수의 축사가 떠올랐고, 남은 절반의 인생이 있다면 20대 이전에 상상했던 그렇게까지 특별한 인생은 아닐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나로 살아가보고 싶은 또 다른 자아를 세워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아직 남은 인생을 걸어 볼 마음에 드는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또 현실의 벽에 계속해서 부딪힐 테지만, 훗날 마주할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에게 후회 없이 아쉬움 없이 살아본 인생이었다, 참 괜찮았다 말해줄 수 있는 그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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