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순의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1993)>를 읽고
<가짜 데미안>
내가 있었다
내 친구가 있었다
그는 눈덮인 겨울 강을 건넜다
그가 신발을 버린 채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가방을 열었다
새 신발을 꺼냈다
그는 다시 강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 맨발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가방 속에서 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내 발목을 물어뜯으며
내 신발을 빼앗았다
그가 내 신발을 신고
가방에서 나가며
강을 향해 소리쳤다
그는 다시 눈 덮인 겨울 강을 건넜다
나는 가방 속에 앉아서
내 신발을 기다렸다
신발은 돌아오지 않았다
맨발의 나는 가방에서 나왔다
빈 가방을 들고
어두운 겨울 강을 건넜다
한 아이가 야간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귀신에게 쫓기다 집 앞에서 마중 나온 엄마를 만나게 된다. 아이는 살았다고 안도하며 엄마에게 매달린다. 그런데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엄마가 무표정하게 아이를 돌아보면서 말한다. “내가 아직도 니 엄마로 보이니?” 박상순의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를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시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나무, 자전거, 신발, 가방 같은 익숙한 단어들이 쓰인다. 그런데 이 익숙한 단어들이 그렇게 생경할 수가 없다. 이 단어들은 말한다. “내가 아직도 그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나무, 자전거, 신발, 가방으로 보이니?” 평소 너무나 잘 안다고 믿어왔기에 더더욱 그것들의 낯설고 차가운 표정이 당황스럽다.
그런데 평소 잘 알던 것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서운 이야기에서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귀신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시집의 할아버지 등등은 끝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정체 모를 단어와 마주하고 있는 건, 엄마가 아닌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귀신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뭔가와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막막한 일이다. 나는 그런 상태를 견디는 게 힘들어서 어떻게든 그 단어들의 정체를 밝혀보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 실패의 여정을 <가짜 데미안>에 나오는 신발과 가방을 중심으로 따라가 보겠다.
신발과 가방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이다. 그런데 이 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도 어떤 신발과 가방을 말하는 건지 통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시인이 그 물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구두나 운동화 또는 낡은 랜드로버나 나이키 운동화라고 쓰는 대신 발에 신는 물건을 총칭하는 단어, 신발이라고 쓴다. 시인은 신발의 구체성을 드러낼 만한 일체의 수식을 거부하는데, 구체성이 제거되자 신발은 개별 신발이 아니라 보편 신발, 국어사전에 실린 개념으로서의 신발에 가까워진다. 이 시의 신발은 ‘동생 입학선물로 엄마가 사준 신발’의 신발 같지만, 실은 현관 앞에 적힌 ‘신발을 벗으시오’의 신발이다. 시인은 ‘구체적인 신발’이 놓여야 하는 자리에 ‘개념으로서의 신발’을 놓는다. 둘 다 신발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쓴다는 점을 활용해 언어놀이를 하는 것이다. 엉뚱한 자리에 놓인 ‘신발’은 기이한 풍경을 만든다. 엄마가 동생에게 입학선물이라고 준 선물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 신발이라는 단어가 들어있고, 동생은 그 단어를 신고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 시집에는 몇 개의 모티브들이 변주된다. 신발과 가방도 그중 하나로 이 시의 신발과 가방은 다른 시들의 그것들과 서로 간섭한다. 나는 이 시에서 떠올리는 데 실패한 신발과 가방의 이미지를 다른 시들을 참조해 그려보려고 했다.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6년 뒤>에서 신발과 가방의 이미지는 예외적으로 자세히 묘사된다. 이 시의 소년은 훔친 구두와 가방을 가지고 소풍을 가는데, 그 구두와 가방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발등에 족쇄 같은 고리가 달린 여자아이의 구두’, ‘어수선한 닭집 옆 주렁주렁 매달린 시장바구니’.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장식이 달린 여자아이 구두를 신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소풍을 갔다고? 그런데 내가 미처 저지할 새 없이 이 이미지는 강가에서 ‘나’와 친구가 뺏고 뺏기는 신발과 가방에 달라붙는다. 나는 어떻게든 신발과 가방의 이미지를 찾아내 그 이미지로 그것들을 규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신발과 가방은 터무니없는 이미지로 나타나 나를 조롱한다.
가짜 데미안이라는 제목에서 추론하면, 가방은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그 유명한 알의 은유로 보인다. ‘나’는 알을 깨고 나오는 대신 가방을 열고 나오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가방의 정체를 알아낸 것일까? 그러나 영 석연치가 않다. 알이 깨지는 거와 비교해 가방이 열리는 건 멋지지도 극적이지도 않고, 게다가 그 가방은 시장바구니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