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다 제 37화
11월 29일 월요일
요다는 시도 때도 없이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 밖에 나가면 나가자마자 풀을 찾아 뜯어 먹었다. 풀은 구토를 돕는다고 하는데, 속이 안 좋아 토하려고 풀을 먹는 것 같았다. 풀을 먹고 나서 바로 토할 적이 많았고 토사물에는 늘 풀이 섞여 있었다. 요다 먹일 풀을 화분에 심어 기르기로 했다. 다이소에서 천 원 주고 캣그라스 씨앗을 샀다. 인터넷에서 캣그라스 키우는 법을 찾아보니 씨앗을 심기 전에 물에 불리라고 했다. 씨앗이 얼마나 필요한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봉지에 든 씨앗을 전부 물에 쏟아부었다. 준비된 화분은 그 십 분의 일도 심을 수 없게 작은 크기였는데 말이다. 블로거들의 사진에서 본 파랗게 자란 귀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의 신중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파랗게 자랄 수 있는 씨앗들이 싹도 틔워보지 못하고 썩게 생긴 것이다. 씨앗을 불리는 내내 고민하다가 씨앗 심는 날 마당에서 긴 텃밭용 화분을 들여왔다. 처음 계획보다 몇 곱절이나 큰 화분에 씨앗을 심기로 한 것이다. 요다를 먹이는 데 그리 많은 풀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현실적 판단보다 씨앗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더 힘이 셌다. 불린 씨앗을 하나도 남김없이 심었다. 요다를 먹이려고 씨앗을 샀다가 이번에는 씨앗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힌 것이다.
맹자는 측은지심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깜짝 놀라 걱정하게 되고 속상해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도 이 마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심지어 사람을 죽이려고 칼을 들고 달려가던 사람도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순간적으로 놀라고 걱정하는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맹자는 이 마음을 근거로 인간이 선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선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위험에 빠진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의 참을 수 없는 본성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길에서 만났을 때 요다는 몹시 아팠다. 동물을 한두 번 키워본 것도 아니고 일단 집안에 들이면 다시 물리기 힘들고 거기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왜 뭣 때문에 길에서 만난 고양이를 위해 내 시간과 노력과 돈을 쏟아붓는단 말인가. 나는 온 힘을 다해 요다를 모른 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은 요다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바보 같은 선택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요다를 모른 체하는 것보다 돕는 게 훨씬 쉬웠다. 모른 체하려고 애쓰는 동안에는 뒤숭숭하기 그지없던 마음이 요다를 안아 드는 순간 기쁨과 확신으로 가득 찼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요즘은 하루가 요다 아침 먹이는 일로 시작한다. 요다에게 아침을 먹이는데 내 무릎에 앉아 억지로 밥을 받아먹는 요다의 푸석한 털 위로 아버지의 떡진 머리가 겹쳐졌다. 아버지는 늘 아팠다. 워낙 몸이 약하기도 하지만 일 년 365일 술을 마시니 안 아플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아버지와 싸우고 신세 한탄할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이혼하라고 했는데 엄마는 자기마저 버리면 아버지를 누가 돌보겠냐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엄마가 그러고 사는 걸 여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탓으로만 여겼다. 엄마의 돌봄이 유독 아버지에게 집중된 건 가부장제의 영향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는 마음은 가부장제와 비교할 수 없이 오랜 기원을 갖는다. 아마도 아이를 보살피는 데서 기원했을 그 마음으로 우리는 아이뿐 아니라 가족과 어려운 이웃 그리고 농작물과 가축을 돌본다. 엄마가 아버지를 돌보는 마음과 내가 요다를 돌보는 마음이 둘이 아닌 것이다. 나는 뒤늦게 엄마에게 공감했다. 엄마도 나처럼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한 것이리라.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나를 너에게 연루시키고, 나와 너를 꽁꽁 묶는다. 엄마가 술 마시는 아버지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같이 살고, 내가 요다를 데려와 굳이 질 필요가 없는 의무를 지고 사는 일이 다 그 마음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