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다 제39화
2022년 2월 27일 일요일
평소 억지로 하는 일들은 억지로도 할 만한 일들인데, 공부가 그렇고 노동이 그렇다. 반대로 평소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는 일들은 억지로는 하기 힘든데, 노는 것과 먹는 게 그렇다. 노는 건 좋지만 불편한 사람들과 억지로 노는 건 세상 못 할 짓이다. 억지로 먹는 건 차라리 고문인데, 안 먹는다고 했더니 강제로 입을 벌리고 음식을 처넣는다면 그보다 참기 힘든 노릇은 없을 것이다. 요다는 밥 냄새가 나면 아오아오 울면서 이불속에 들어가 숨는다. 나는 이불속의 요다를 잡아다가 밥을 먹이는데, 사료로 빚은 13개의 환을 먹이는 동안 요다는 매 맞는 개수를 헤아리는 아이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견딘다.
신부전 진단을 받은 뒤로 요다는 하기 싫은 건 억지로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건 조르고 졸라야 겨우 할 수 있는 처지가 됐다. 요다가 조르는 건 딱 하나다. 밖에 나가는 것. 처음에 요다는 눈만 뜨면 밖에 나가겠다고 온 집안의 창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늑대 소리로 울부짖었다. 방충망을 열거나 뜯고 탈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차 조르는 횟수와 강도가 줄어들더니 요즘은 작은 소리로 야옹거리다가 안 되면 포기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집을 잠자는 곳으로만 알던 아버지가 명퇴당하고 집에 있는 것처럼 보기 어색하고 안쓰럽다.
요다는 왜 좀 더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일까. 나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순응하는 요다가 의아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는 그만큼의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요다 밥 먹이는 게 하기 싫고 산책시키는 건 귀찮고 주사 놓는 건 무서웠는데 말이다. 나는 바늘 공포증이 있었다. 특히 주삿바늘이 무서웠다. 어떻게든 주사를 안 맞고 싶었지만 어릴 땐 엄마가 병원에 따라다니며 윽박지르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성인이 돼 제일 좋았던 건 주사를 맞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 혼자 다니게 되면서 의사가 주사를 맞으라고 하면 싫다고 대답했다. 평생 주사를 안 맞으려고 했는데, 40대 중반에 다리를 다쳐 주사보다 몇 곱절 무서워하던 침을 맞게 됐다. 내가 내 발로 침을 맞으러 다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다친 다리가 반년 넘도록 낫질 않다 보니 걸을 수 있다면 침이 아니라 뭐라도 하겠다는 심정이 됐다. 침을 수백 번 맞고도 다리를 고치지는 못했다. 그런데 침을 수백 번 맞다 보니 바늘 공포증이 나아졌다. 바늘 공포증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남에게 주사를 놓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중학교 때 친구 집에 갔더니 거실에 주사기가 있었다. 엄마가 당뇨라서 매일 주사를 놓는데 엄마가 혼자 놓기도 하고 친구가 놔주기도 한다고 했다.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데 주사를 놓는다고? 우리 엄마가 당뇨가 아닌 게 어찌나 다행스럽고, 그런 험한 일을 해야 하는 친구가 어찌나 안 돼 보이던지. 그런데 내가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퇴원한 요다를 집에 데려오면서 당장 다음 날부터 주사를 놓을 일이 끔찍했다. 그러나 몇 번 해보니 주사 놓기는 중학생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다. 주사 놓을 땐 그나마 살짝 따끔한 느낌마저 내 몫이 아니라서 두려움은 훨씬 쉽게 사라졌다.
주사 놓는 것보다 밥 먹이는 게 훨씬 힘들었다. 외계인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요다 스스로 밥을 먹게 해달라고 하리라. 요다에게 밥을 먹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어느 틈에 외계인에게 소원을 빌고 있었다. 그러한 망상은 시간이 지나 저절로 사라졌는데, 밥 먹이는 게 처음처럼 힘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급식 실력은 나날이 향상돼 스승 유튜버들 못지않게 능숙해졌다. 처음에 유튜브를 보고 병간호를 공부할 때 스승들의 병간호 솜씨 이상으로 병간호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청소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하는 것처럼 편안하고 일상적인 태도로 고양이에게 밥 먹이고 주사를 놨는데, 병간호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내겐 그런 태도가 놀랍기만 했다. 나는 결코 그들처럼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병간호를 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래는 원래는 우리처럼 뭍에 살았는데 오래전에 바다로 들어갔다고 배웠다. 나는 물에 들어가 잠깐만 숨을 못 쉬어도 죽을 것 같은데 뭍에 살던 동물이 어떻게 물에 적응할 수 있었을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병간호 같은 일에 익숙해지고 나니 시간이 수천만 년쯤 충분히 주어진다면 나도 물속이든 어디든 적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