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만보를 걷는다. 외출한 날은 밖에서 걷고 들어오고 집에 있는 날은 동네에서 걷는다. 동네에 걷는 코스가 있다. 산비탈의 마루와 일방통행로.
몇 해 전 인부들이 산비탈에서 뚝딱거리고 난 뒤 산 아래서 꼭대기까지 나무 계단이 놓였다. 계단 중간 중간에는 운동기구와 의자가 놓인 널찍한 나무 마루가 있는데, 거기가 나의 첫번째 걷기 장소다. 마을을 지나 수풀이 우거진 좁고 구불구불한 오솔길 끝에 있는 그곳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마루의 크기는 가로 24보 세로 15보. 집을 나와 일직선으로 걸으면 혜화, 종로, 을지로를 거쳐 충무로까지 걸어야 만보인데, 직사각형 마루에서 만보를 걸으려면 250바퀴를 돌아야 한다. 주위의 풀과 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가 익고 낙엽이 지는 걸 보며 마루를 맴돌고 있으면 계단에서 초록 목걸이를 한 고양이가 나타난다. 녀석은 내 눈치를 살피다 의자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세수한다. 나는 녀석이 놀라서 가버릴까 봐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작은 직사각형을 그리며 걷지만 녀석은 얼마 안 있어 가버린다.
밤에는 플래시를 비추며 아무도 없는 깜깜한 풀숲을 지나기가 무서워 거기 안 가고 집 앞의 일방통행로를 걷는다. 도로는 마을을 빙 둘러 내려가고 운동 나온 이들은 도로를 원형트랙 삼아 돌지만 무릎이 안 좋은 나는 그 가운데 평지 구간을 왕복한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사이에 있는 70여 미터의 평평한 길을 이쪽 맨홀과 저쪽 맨홀을 반환점 삼아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저쪽 맨홀 위에는 비탈에서 자란 잣나무 가지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 아래를 지날 때마다 고개를 들어 가지를 쳐다보는데 가지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간 형태가 하늘에 대고 손가락 욕을 하는 것 같다. 맨홀에서 반환점을 돌려는데 누군가 나를 앞질러 뛰어간다. 옆집 청년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나는 겨울 잠바를 꺼내 입었는데 그는 여전히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다. 김춘재. 그의 집 문패에 써 있는 이름은 그의 이름일까? 주말이면 그의 집 마당에서 최신 가요를 틀어 놓고 줄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에서도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겠지. 그는 오르막길을 뛰어 사라졌다가 금세 도로를 한 바퀴 돌아 나와 마주친다. 짧게 자른 머리에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차림새. 가끔 마을버스에서 마주치는 그는 교통 캠페인에서 시키는 대로 백팩을 앞으로 메고 있다. 그는 코로나 기간에는 물론이고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뒤에도 마스크를 쓰고 뛰다가 최근 들어서야 마스크를 벗었는데, 맨 얼굴이 볼 때마다 낯설다. 우리는 몇 년째 같은 도로에서 운동하지만 눈을 마주치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고 길 가장자리에 바싹 붙어 서로를 지나친다. 그는 도로를 서너 바퀴 전력 질주한 뒤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아직 7천보가 남았다.
도로에는 귀가하는 차와 배달 오토바이가 드문드문 오간다. 헤드라이트가 눈을 찔러 뒤를 돌아섰다가 난간이 보여 그걸 붙들고 스트레칭을 하고 돌아서니 저만치 검은색 9인승 카니발이 주차 중이다. 라이트가 꺼지고 문이 열리면서 몸집이 작은 50대 남자가 내린다. 덩치 큰 차체로 인해 남자는 발육이 더딘 중학생만큼이나 왜소해 보인다. 그가 리모컨으로 차문을 잠그며 비척비척 갈지자 걸음을 걷는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그의 다리는 가늘고 한쪽이 조금 짧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고 나서 내가 도로를 한두 번 왕복했을까. 그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배가 땅에 닿을 것 같이 살 찐 웰시코기를 앞세우고 계단을 올라온다. 그는 언제나처럼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목줄을 길게 잡고 개가 끄는 대로 끌려 다닌다. 처음엔 누가 시켜서 억지로 나왔나 했다. 그런데 매일 밤 늦게 귀가해 귀가하자마자 개를 산책시키는 걸 보면 개를 산책시킬 다른 가족이 없는 것 같다. 웰시코기와 그는 오래 산 부부처럼 서로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각자 제 볼 일을 보다가 계단을 내려간다.
이제 밤 깊은 도로에는 귀가하는 차도 배달 오토바이도 다니지 않는다. 불빛이 없는 도로를 독점하고 걷는데, 어두운 골목에서 60대 남자가 나와 슈퍼로 향한다. 잠시 후 슈퍼에서 나오는 그는 한 손에 검정 비닐 봉지를 들고 있다. 걸을 때마다 비닐봉지에서 술병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그를 마지막 손님으로 슈퍼 문이 닫히고 불이 꺼진다.
슈퍼 앞 의자에 앉는다. 그 자리가 불 꺼진 관객석처럼 아늑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어둠을 음미하는데 언덕 아래서 전기차 특유의 딸랑이는 소리를 앞세우고 빨주노초 색등으로 장식한 연두색 마을버스가 올라온다. 무대처럼 환한 버스 안에는 젊은 남녀 둘뿐이다. 버스에서 내린 남녀는 가로등 조명 아래 서로를 껴안는다. 여자는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남자의 허리를 안은 채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남자는 드라마의 남주인공처럼 여자의 어깨를 안고 정수리에 얼굴을 묻은 자세다. 남자는 키가 작은 편인데 여자가 거기에 알맞춤하게 작아서 가능한 자세다. 여자는 길 건너 마당 넓은 집에 산다. 그 집엔 엄마와 똑 닮은 딸이 둘인데, 여자는 둘 중 키가 큰 쪽이다. 남자는 매일 밤 여자를 바래다주고 정류장에서 껴안고 있다가 다음 버스를 타고 간다. 나는 그들 옆에 있기가 뭐해서 일어나 걷는다. 반환점을 한 바퀴 돌아와도 두 바퀴 돌아와도 조명 아래 남녀는 시간이 멈춘 듯 같은 자세다. 반환점을 다섯 바퀴째 도는데 마침내 마을버스가 지나가고 남자가 그 뒤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린다. 돌아보니 여자가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왜 버스를 놓친 것일까. 100여 미터 떨어진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설 때쯤 여자가 남자와 통화를 하더니 집으로 들어간다.
만보기를 확인한다. 10245. 점수 주위로 폭죽이 터진다.
나는 가로등 아래 빈 무대를 지나 집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