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태국 여행 2018-2019 10화 방콕
두 번째 숙소의 운영자는 탄. 탄은 남편이 죽고 대학 다니는 두 아이와 같이 산다. 대문 안에는 세 채의 집이 있고, 거기 남편의 형제 셋이 모여 산다. 형제들은 제일 안쪽에 있는 집에서 나고 자랐고, 결혼 후 그 옆에 집을 짓고 모여 살게 됐다. 탄은 남편이 죽고 나서 받은 보상금으로 지금의 집을 지어 들어왔다. 탄의 집은 2층으로 1층은 숙박 손님이 2층은 식구들이 쓴다. 내가 방을 예약을 안 해놓는 바람에 예약이 꽉 찬 날이면 나는 2층에 있는 탄의 방에서 자곤 했다. 2층은 보통의 살림집인데 부엌살림이 거의 없었다. 탄은 매일 밤 봉다리 봉다리 저녁 먹을 걸 사 들고 내 방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탄이 날 위해 일부러 장을 본 줄 알았는데, 그건 탄의 저녁 식사이기도 했다.
탄은 주중엔 밥을 사 먹고 주말엔 형님네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나도 주말마다 그 자리에 초대받았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망고나무 그늘에 식탁이 차려졌다. 밥, 국, 생선구이, 생야채. 그야말로 가정식 백반. 다행히 나는 맛있다는 뜻의 태국어를 알고 있었다. “아로이!” 음식은 맛있고 인심은 좋으니 권하는 만큼 다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소화 기능이 좋지 않다. 그래서 배운 또 하나의 생존 태국어가 있었으니 “이마.” 배가 부르단 뜻이다. 탄의 형님 포가 더 먹으라고 몇 번이고 권할 때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마.”
“나는 더운 게 좋아.”
점심을 먹고 나서 탄이 말했다.
“정말?” 내가 물었다.
“추우면 사람이 게을러지잖아.”
“추우면 게을러진다고?”
“추우면 활동성이 떨어지고 집안에만 있게 되잖아.”
뜻밖에도 더운 나라에서는 추운 나라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믿고 있었다. 탄의 말투에선 게으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읽혔는데, 그것도 뜻밖이었다. 나는 더운 나라에선 부지런함에 대한 강박이나 게으름에 대한 수치심 없이 맘 편하게 게으름을 피우는 줄 믿고 있었다. 한국에선 더운 나라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믿는다. 날이 더우면 일이고 뭐고 다 귀찮고 나무 그늘에 누워 쉬고만 싶어지는데, 더운 나라는 그렇게 누워만 있어도 일 년 내내 나무에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리고 씨만 뿌려놓으면 곡식들이 자라나 이모작 삼모작을 할 수 있다 보니, 사람들이 저절로 게을러지고 만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더운 나라에서 만난 사람들은 게으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탄만 해도 그렇다. 회계사인 그녀는 매일 아침 5시에 집을 나가서 밤 9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주말에는 출근을 안 했지만 대신 종일 손님방을 치우고 손님들을 돌봤다. 피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카페에서 일하고 저녁이면 가사 일을 했고,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는데 그마저도 못 쉬고 일을 할 때가 많았다. 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다니는 병원이며 마사지숍들은 모두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주말도 안 쉬고 영업했다.
“한국에선 더우면 사람이 게을러진다고들 해. 그래서 더운 나라 사람들은 게으르다고.”
“난 안 게으른데. 추우면 집안에만 있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더우면 활동성이 좋아지지.”
사람은 더워도 추워도 활동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확실히 더위보다는 추위가 활동성을 더 떨어뜨린다. 내가 그 좋은 사례다. 언젠가부터 나는 겨울만 되면 너무 기운이 없어서 차라리 곰처럼 겨울잠을 자고 싶어진다. 한국의 겨울을 피해 더운 나라에 간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더운 나라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봄날의 곰처럼 활발해졌다. 그러나 활발하다고 해도 곰은 곰이다. 탄은 자신이 출근할 때도 자고 있고 퇴근할 때도 자고 있고 주말 내내 방에 처박혀 있는 나를 보면서 추운 나라 사람들은 게으르다더니 정말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탄의 집엔 먼지 한 톨이 없었는데, 집을 그렇게 유지하느라 탄은 집에 있는 내내 청소를 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졸거나 노트북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탄에게 그런 모습을 들킬까 봐 마음 졸였다. 탄이 눈치를 준 것도 아닌데, 나 혼자 괜히 그랬다.
다들 출근하는 월요일이 되면 망고나무 그늘에는 포가 키우는 다섯 마리의 고양이와 나만 남았다. 고양이들에 둘러싸여 책을 읽다 보면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고개를 들면 탄의 시아주버니이자 포의 남편인 첫째 형이 선풍기를 틀어놓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어두컴컴한 집 안에 있다가 헝클어진 머리에 웃통을 벗은 반바지 차림으로 가만히 나타나 외부 선풍기를 틀어주고, 어두워지면 외부 전등을 켜줬다. 낮 동안 고양이를 돌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고양이 밥을 주고, 고양이가 싸우면 공격하는 놈을 안아 안으로 데려갔다. 그는 알바 삼아 투숙객들을 공항까지 태워주는 일도 했다. 내가 공항에 가던 날 그는 아침 일찍부터 마당에서 차를 닦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그는 내 손에 뭔가를 쥐여주더니 인사할 새도 없이 차에 올라 사라졌다. 그가 준 건 부조로 깎은 작은 불상이었다.
집 뒤로 수로가 있었다. 한낮엔 집에 있다가 저녁에는 수로를 따라 산책을 했다. 검은 물이 흐르는 수로를 따라 오토바이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좁은 길이 이어졌다. 그 길 끝에서 아담한 아치형 석교를 넘으면 절이 나왔다. 석교 옆으로 절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었다. 처음 그 쪽문을 들어서던 날 쪽문 옆 정자에서 웬 스님이 전화하고 있었다. 팔뚝 가득 문신을 한 데다 담배를 물고 있어 스님이라기보단 조폭 같았다. 스님이 다른 델 보며 전화를 하는 틈을 타 슬금슬금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개들이 몰려와 죽일 듯이 짖어댔다. 스님의 정자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정자가 있었다. 스님과 개들을 무사히 통과해 나는 거기 앉았고, 그날 이후로 거기 앉아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됐다.
매일 저녁 문신을 한 스님이 닭과 개들에게 먹이를 줬다. 너무 잘 먹어서 그 큰 얼굴이 작아 보일 정도로 몸통이 두꺼운 개들은 먹이를 준비할 때부터 흥분해서 스님 주위를 맴돌았다. 개들의 배식이 끝나면 닭들의 배식이 시작됐다. 스님이 양동이 가득 모이를 가지고 나가 마당 여기저기에 흩뿌리면 닭들보다 먼저 비둘기들이 날아와 모이를 쪼았다. 다음은 내 차례. 스님은 내게 다가와 손으로 밥 먹는 시늉을 해 보이셨다. 저녁을 먹었는지 물으시는 거였다. 스님은 마당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배불리 먹이고 난 뒤엔 낙엽을 쓸기 시작했고 개들은 스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마당 여기저기에 드러누웠다.
매일 똑같은 시간이 반복됐고, 어느새 나도 그 일부가 되었다. 나는 저녁마다 절의 쪽문으로 들어가 정자에 앉아 마당으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스님과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가 됐고, 개들도 나를 보면 다가와 친한 체를 했다.
법당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명상하려는 시도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나의 집중력은 명상센터를 나온 이후로 내리 하강 곡선을 그려 그즈음은 명상센터에 들어가기 전으로 고스란히 돌아가 있었다. 생각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흘러왔다. 생각은 멀리 서울까지 가지 않고 여행지 주변에 머물렀고 흘러가는 강물만큼이나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유속은 빠르지만 잔잔한 강물, 거기에 나를 내맡기고 있는 게 나쁘지 않았다.
몇 해 전 동남아여행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도무지 한 자리에 머물지를 못했다. 쉴 새 없이 걷고 또 걸었고 이동하고 또 이동했다. 그건 19살에 처음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의 나의 여행 패턴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가봐야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들어 멈춰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종일 긴 의자에 누워 책을 보는 백인 여행자들이나 하는 일 없이 그늘에 앉아 있는 현지인들을 보면 그게 그렇게 신기했다. 저들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몇 년 후 내가 그들처럼 한 자리에 가만히 있게 된 것이다. 머물러 있어도 떠나고 싶다는 조바심이 들지 않았다. 마음껏 걸을 수 없게 된 후에야 나는 한 자리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