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광 동동

동동 제2화

by 김지현


동동에게 산책은 평생에 걸친 식지 않는 열정이다.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동동이 방에 들어와 나를 쳐다봤다.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쳐다봤다. 누군가의 시선을 견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갈까?” 내가 물으면 동동은 기쁨에 찬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들고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동동이 종종걸음으로 현관 앞을 몇 번이고 오가며 조바심치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늘 가는 산책 코스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탁 트인 곳이다. 빽빽하게 집들이 들어선 동네에 사는 우리는 넓게 트인 공간에 목말랐다. 교문을 통과하면 우리는 사람들이 맴돌고 있는 운동장 가장자리를 지나 운동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막상 넓은 공간에 가도 나는 서 있을 줄밖에 모르는데, 동동은 운동장 한가운데 이르면 큰 원을 그리며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내가 손뼉 치면 더 신이 나서 달렸다. 몇 바퀴고 뱅글뱅글 신명이 다할 때까지 달렸다. 산책 중에 우리가 교감했던 흔치 않은 순간이다.


동동은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파워워킹 대열에 끼어 운동장 가장자리를 돌고 있으면 동동은 저 혼자 돌아다니며 화단 주변에 뿌려진 개들의 냄새를 확인했다. 볼일이 끝나면 동동은 내 주변을 얼쩡거렸다. 나가자고 조르는 거였다. 내 발길이 교문을 향하면 동동은 신이 나서 앞장을 섰다. 나는 운동장에 좀 더 있고 싶었지만, 동동은 운동장에 머무는 것보다는 도로변이나 골목을 걷는 걸 좋아했다. 거기 다른 개들의 흔적이 더 많이 흩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산책 내내 우리의 관심사는 거의 겹쳐지지 않는다. 나는 걸으며 하늘과 나무를 보고 바람을 느끼는 게 좋고, 앞장서 가는 동동의 뒷모습을, 치어리더의 응원수술처럼 풍성하게 흔들리는 꼬리와 엉덩이를 보는 게 좋다. 또 동동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좋다. 깊은 밤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에 단둘이 있을 때면 종이 다른 우리가 만나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동동은 하늘과 나무 같은 데는 일절 관심 없다.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관심을 유지할 뿐 나한테도 거의 관심 없다. 나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 따위는 아주 따분하게 여긴다.


내게 산책이 휴식이라면 동동에게 산책은 사회생활이다. 산책 내내 동동의 관심은 온통 다른 개들의 냄새를 확인하고 자신의 냄새를 남기는 것에 쏠려 있다. 동동은 가로수, 전봇대, 화단 울타리, 소화전 등 대지에 수직으로 솟아오른 것들을 절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그 밑동에는 개들의 오줌이 뿌려져 있게 마련인데, 동동은 그것들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고 똑같은 집중력으로 세심하게 탐색한다. 그것들에 코를 붙인 채 냄새를 맡고 혀로 핥는 모습은 흡사 와인 감별사 같다. 그러나 동동이 핥고 있는 건 와인이 아니라 개 오줌에 매연과 먼지가 시꺼멓게 달라붙은 얼룩인 것이다. 나는 그 짓이 더러워서 싫고, 납득이 안 돼서도 싫었다.


동동은 냄새의 주인공들 대부분과 직접 만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서로의 얼굴을 모른 채 오줌이라는 매체를 통해 매일 소식을 주고받는 개들의 소통은 에스엔에스를 연상시킨다. 동동은 이와 같은 사회활동에 인간 에스엔에스 중독자들 이상으로 집착했다. 그러나 서로 만날 일도 없는 개들끼리 뻔질나게 메시지만 주고받으면 뭘 한단 말인가. 동동은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수도 없이 걸음을 멈췄는데, 나는 그때마다 멈춰 서서 동동을 기다리는 게 지루하기만 했다.


그래도 나는 밖에 나갈 일이 있을 땐 반드시 동동을 데리고 다녔다. 가까운 곳은 물론이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는 먼 곳에도 데리고 다녔고, 사람을 만날 때는 동동과 같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만났다. 나가려고 보니 동동이 엄마와 나가고 없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땐 기다렸다 데리고 나갔다. 피치 못하게 혼자 나가게 되면 동동이 나갈 기회를 놓친 것이 다니는 걸음걸음마다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나는 대체로 남의 사정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런데 왜 유독 동동의 산책에만 그토록 마음을 끓이는 것일까? 동동이 원하니까,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서? 만약 동동이 먹는 걸 좋아한다면 어땠을까? 동동에게 맛난 걸 먹이고 싶어서 역시 안달을 떨었을까? 그럴 리 없다. 나는 누가 무엇을 먹는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고, 동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동동이 먹는 걸 밝히는 성격이었대도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는 짓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구들이 동동이 달랠 때마다 먹을 걸 줬다면 버릇 나빠진다고 나무랐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동동을 산책시키려 한 건 동동이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나에겐 ‘모름지기 개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 이미지에선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 요즘 말로 산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나는 동동을 통해 그 이미지를 재현하고 싶어 했는데, 동동과의 관계는 그 이미지를 강화하기도 하고 교란하기도 했다. 여느 개들과 마찬가지로 동동은 산책을 미친 듯이 좋아하고, 나는 그런 동동을 보면서 내 생각이 맞다고, 개들은 밖에 나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때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동동이 산책하는 모습이 내 이미지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동동은 산책 내내 오줌 냄새만 맡고 다니는데, 내 이미지 속엔 그런 더러운 짓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내 이미지와 불화하는 그 짓이 끝내 못마땅하기만 했다.


내 이미지의 원형은 어린 시절 동네 개들의 모습일 것이다. 차들이 많지 않던 시절의 골목은 좋은 놀이터였다. 아이들과 개들이 같이 어울려 놀았고, 개들이 자기들끼리 어울려 쏘다니는 모습도 흔했다. 사라진 모든 고향이 그렇듯이 그 풍경이 내겐 이상향이 되었다. 요즘도 개발이 안 된 동네의 고물상 같은 데서 풀어 키우는 개들을 볼 때가 있다. 그 개들은 어릴 적 골목의 개들처럼 제 맘대로 싸돌아다니다가, 낯선 사람이 지나가면 우르르 달려들어 짖어대는데, 나는 그 개들의 처지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나갈 때마다 주인을 졸라댈 필요 없이 저 다니고 싶은 대로 다니는 그 개들의 처지가 동동을 대신해서 안타깝도록 부러운 것이다.


나는 언제나 자유로운 개들의 모습에 사로잡힌다. 동동에게 감정 이입해 그들이 누리는 자유가 부러운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동동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동동은 자유 같은 거 관심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동동은 나가라고 해도 혼자서는 밖에 안 나간다. 공원 같은 데 풀어놔도 내 근처에서 10m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다. 나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다니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또 동동이 자연을 좋아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동동은 자연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산이나 강이 아니라 매일 가는 별 볼 일 없는 골목과 시끄럽고 지저분한 도로변을 좋아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고 자연을 노래하는 동물은 인간이지 개가 아닌 것이다.


#개 #강아지 #반려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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