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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 Oct 22. 2021

작은 집 안 더 작은 집

<사랑의 표현>



2014년 12월의 기록-1



이제 혼자 살아도 되겠지. 서른이 되었고 부모님 집에서 나오게 되었다. 복잡한 이태원역 사거리에서 점점 한산 해지는 길 따라 내려가다 유독 조용한 우측 골목으로 꺾으면 나오는 다세대 주택 1층의 좌측 호. 룸메도 없이 나만의 현관문이 생긴 건 난생처음이었지만 매일은 이제와 다름없이 단조로웠다. 아침 일찍 나섰다 밤늦게 퇴근, 귀갓길 허전함에 집어 온 2000원짜리 화분에 물을 주고 무진장 느리게 샤워를 했다. 한 사람 쓰기엔 좀 널따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이동식 욕조와 입욕제를 주문하는 자정이 가면 그 입욕제를 푼 욕조 안에서 다른 입욕제를 검색하는 자정이 왔다. 난 좋아하는 게 많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가라앉지? 책도 더 사고 빔프로젝터와 미니 와인셀러도 들였지만 실은 그걸로 될 리 없었다.



뭔가 돌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언젠가 개를 키우고 싶어 그를 반대하는 부모님의 집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막상 공간을 꾸리고도 내내 반복되던 야근이 문제였다. 근무 시간 동안 혼자 두어도 될만한 동물이 있을지 궁리하던 차에 건너 아는 분이 반려하는 달팽이의 새끼들을 분양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얼른 연락해 구별이 쉽게끔 까만 애 노란 애 한 마리씩을 부탁드렸다. 가능한 한 싱싱한 채소로 맞이하려고 약속일 전날 마트에 들러 적상추, 청상추, 애호박, 코코피트(달팽이 모래), 그리고 큼지막한 락앤락을 샀다. 어릴 적 놀러 갔던 바닷가에서 고동이 참 귀엽길래 데려가 키우려고 밀폐용기 가득 담았는데, 뚜껑 꼭 닫고 품에 안은 채 집에 와 열어보니 전부 죽어 있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으니 락앤락 뚜껑에 얼마나 열심히 구멍을 뚫었을까요. 인터넷에서 찾은 대로 코코피트를 폭신하게 깔고 적상추와 청상추 한 장씩을 올렸다. 공기가 통하고 땅이 부드러우며 먹을 것이 충분한 이 집을 두 달팽이들이 좋아해 줄까?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둔 것처럼 이사 후 처음으로 일찍 누웠다.




오래전 한국에서 월드컵이 한창이던 시기, 한층 업 돼 있던 아빠는 무슨 경기였나 아무튼 한국이 이긴 다음 날 작은 개 한 마리를 안고 귀가했다. 동그랑땡 같은 금빛 눈썹이 콩알만 한 검은 두 눈 위에 땡땡. 신비로울 만큼 귀여운 그 강아지의 근엄한 증조할아버지 모습까지 인쇄된 화려한 혈통증명서가 보란 듯 식탁 위에 펼쳐졌다. "천연기념물이야. 블랙탄이란 종인데, 아무튼 진돗개니까 줄여서 진구, 그러니까 부르기 좋게 찐구!" 아빠는 집에 오는 길 이미 이름까지 지어 두었다. 너무 신나 구르다시피 하는 동생들과 달리 당시의 나는 장녀 콤플렉스에 잠식된 근심 가득 첫째 딸이었기에 강아지가 생겨서 기쁘기보단 개를 무서워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 허락 없이 개를 데려 온 아빠가 싸우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래서 마음의 벽을 세우고 다가가지 않았는데, 그날 밤 베란다에 둔 이동장 안에서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는 찐구가 걱정돼 나도 잠에 들지 못했다. 한참을 바라만 보다 조심조심 들어 품에 안으니 아기같이 쌕쌕 대며 잠에 들었다. 왠지 조금 눈물이 나 그대로 같이 부엌 바닥에 엎드려 잤다. 그렇게 찐구는 새나 햄스터 등 소동물만 키워 본 우리 가족의 첫 반려견이 되었다.



나날이 늠름한 얼굴, 찬란한 , 빳빳한  다리를 지닌 모습으로 성장한 찐구는 우리 가족과 경기도 어느 신도시에서 반년을 보낸  함께 미국 북버지니아에 도착했다. 애당초  번째 해외파견이 확정되어 찐구를 분양받았다는 아빠는, 지난 파견  '여기서 진돗개를 키운다면 얼마나 멋질까' 꿈꿨다고 했다. 손님이라도 초대할 때면 " '코리안 내셔널 트레져' 모시고 오느라 서류 엄청 내고 얼마나 고생했다고"라며 함박웃음을 머금고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신선한 음식을 차려주지도, 침실에서 재우지도, 더군다나 매일 산책시키지도 않았으니 돌아보면  서툰 보호자들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찐구를 많이 예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가끔 아빠에게 화가 나면 핑곗거리 삼았을  엄마 역시 ' 덩치 크고 시꺼먼 ' 살뜰히 챙겼다. 둘째 동생은 윤신근 수의사의 <애완동물 기르기> 해지도록 읽고  읽을 만큼 모든 동물을 좋아했어서, 찐구가 온종일 뒷마당을 전속력으로 뛰어다니며 이틀에   꼴로 잡아 선물하는 다람쥐를 앞에 두고   눈이 벌게졌다. 하지만 책에서 이렇게 배웠다면서 활짝 웃는 얼굴로 찐구에게 칭찬 간식을 주었고  돌아 울며 작게 파낸 땅에 다람쥐를 고이 묻었다. 동생의 다람쥐 무덤이 앞마당   빼곡해졌을 즈음 아빠의 4 파견 기간이 끝나고 가족은 각지로 흩어졌다.



다른 주의 대학에 진학해 들어가게 된 내 기숙사, 살던 동네에서 입시를 마치느라 엄마와 동생들이 얻은 작은 아파트, 회사 복귀로 돌아온 한국에서 임시 거처로 구한 아빠의 오피스텔, 당시 판단으론 그 어디에도 찐구가 있을 곳이 없었다. 일 년 후 엄마가 귀국하는 시점을 기약하며 그동안만 잘 부탁한다고 먹이던 양고기 사료 몇 포대와 함께 찐구를 삼촌에게 맡겼다. 삼촌은 너무 짖어 도저히 집에 둘 수 없었던 찐구를 일터 마당에 묶어두고 보살폈는데, 생전 처음 묶여 지내는 걸 견디지 못한 가엾은 멍멍이는 잠깐 풀어준 틈을 타 달렸다. 아마 우리를 찾아 뛰었겠지. 찐구의 달리기는 아주 빠르다. 그 길로 차에 치여 즉사했다.




아빠에게 또다시 개를 키울 건지 물었던 적이 있다. 아빠는 식물도 키우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화분을 선물 받으면 무섭다고 했다.




긴 세월이 무색하게 두렵고 긴장됐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취소해야 할지 고민하며 락앤락 핸들 꽉 쥔 손을 덜덜 떨었다. 찐구의 죽음으로 시작해 햄스터, 병아리, 소라게, 카나리아, 심지어 달걀까지, 우리 가족 안에서 숨을 거두었거나 생명으로 거듭나길 실패한 모든 존재의 마지막 모습들이 하나 둘 스쳐갔다. 그러나 울상으로 도착한 곳의 문이 열리자 마치 다른 차원으로 순간 이동한 듯 공기가 달라졌다. 지금도 그날 그 장소를 떠올리면 자세한 무엇도 기억나지 않고 다만 가득했던 밝은 빛이 떠오른다. 아마 초여름 대낮의 큰 창이 달린 공간이라 그랬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두 달팽이들이 눈부시게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작은 동물을 다치거나 병들지 않고 제 명 다 할 때까지 키울 수 있을까?' 그 옛날 고동들처럼 모르는 새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자꾸만 멈춰 안을 들여다보며, 우리 셋은 우리의 작은 집에 도착했다. 달팽이들은 작은 집 안의 더 작은 집 안을 손톱만큼씩 이동하며 부지런히 상추를 뜯었다.



휴대폰 사진 앱에 폴더를 만들어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들여다보았다. 지금쯤 그 작은 집 어디를 지나고 있을지 끊임없이 궁금했다. 퇴근 후엔 헐레벌떡 집에 도착해 제일 먼저 달팽이집부터 열었다. "잘 있었니? 맛있었어?" 손 끝 힘 빼고 들어 올려 패각을 살살 닦고 흙을 청소한 뒤 푸릇한 상추와 새로 썰은 애호박을 깔고 난각 가루를 뿌려주었다. 패각 무늬대로 까만 줄무늬 달팽이는 줄이, 노란 점박이 달팽이는 점이라고 이름 붙였다. 줄이 점이는 하루하루 패각 무늬를 바꾸며 빠르게 자라났고 한 달쯤 지나자 손바닥만 해져 애호박을 파고드는 가지런한 이빨들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나의 두려움도 달팽이들 따라 모습을 바꾸다 어느새 전혀 다른 감정이 되어 있었다. 내일은 뭐 먹일지를 구상하느라 죽을까 봐 걱정할 틈이 없었다. 줄이 점이가 잘 보진 못하겠지만 혹시 몰라 달팽이집 가까이 둔 식물용 탁자도 더는 작은 화분 하나 올릴 자리 없이 이런저런 풀들로 가득 찼다.







2014.07.06 줄이 점이를 만났다. 부화한지 한달쯤 되었다고 했다.



보름만에 많이 자란 모습



패각이 매일 달라졌다. 알고보니 점이도 점이 아닌 줄이었네.



애호박은 언제나 잘 먹었다. 우리 닮았네! 라며 기뻤던 기억.



혼자라면 안 샀을 무화과를 사주었지만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녹아 붙은 인절미처럼 사이 좋은 둘




우리 찐구 3살 즈음.








<사랑의 표현>

01. 비극일까 희극일까

02. 작은 집 안 더 작은 집

03. 숨의 화음

04. 생닭을 사 왔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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