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표현>
2014년 12월의 기록-2
<라이온 킹>에서 티몬을 유독 좋아해 생일날 받은 캐릭터 펜 세트 중 티몬 것만 끝내 새 걸로 남겨 두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랑 장 보러 갔다가 기회가 되면 Petco(미국의 펫 샵 체인점)에 놀러 가곤 했는데 거기서 페럿을 처음 보았다. 햄스터와 기니피그 옆, 마찬가지로 작은 철장에서 두 마리가 엉켜 자고 있는 모습이었고 별 감흥은 없었다. 몸이 길쭉하고 짧은 다리에 귀가 크고 둥근 점이 내가 좋아하는 티몬과 닮아 들여다보게 될 뿐이었다(티몬의 모델인 미어캣은 몽구스과인 반면 페럿은 족제비과로 실은 아주 다른 동물이다). 먹이사슬 상단의 족제비과 동물을 설치류 동물 바로 옆에 진열한 것, 동물을 진열한 사실 자체, 구경하며 즐거웠던 나와 동생들, 지금 기준으론 뭐 하나 정상적인 데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땐 우리 중 누구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다. 당시 11세였던 나, 30세가 되었다고 크게 다를까?
살아오며 페럿을 떠올리거나 얘기했던 적은 아마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페럿이 흔한 반려동물로 인식되는 미국에서조차 '페럿 키우는 사람들은 좀 은둔형에 괴짜 같다'는 편견이 만연했다. 어디까지나 바보 같은 일반화에 불과했겠지만 실제로 펫 샵을 좋아할 나이가 지나고 나니 페럿을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 '은둔형'이란 표현의 실체를 이제는 알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선 추후 적기로 하고...
아무 거나 클릭하며 웹서핑을 하던 어느 날 은빛 털에 까만 코를 한 어느 페럿의 클로즈업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20년 만에 보는 페럿 얼굴이었다. 이렇게 예쁘게 생겼었나? 푹 빠져 몇 날 며칠을 페럿에 대해 검색했다. 만일 키운다면 뭐가 필요할지 리스트도 작성하고 서울에 유일한 페럿 분양 업체란 곳도 찾았다. 미국에서 출발한 새끼 페럿들이 며칠 뒤면 검역을 마치고 그 샵으로 도착한다는 공지글을 읽고 날짜에 맞춰 반차까지 냈다. '펫 샵에서 동물을 사면 안 되는데.' 잠깐 주저하긴 했지만 그날의 나는 아마 누가 뭐래도 갔겠지. 줄이 점이 데리러 가던 날만큼 두렵진 않았는데 왜인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며칠 벼락치기한 것 말곤 페럿에 대한 기억이나 접한 경험담이 거의 없단 건 여전했다. 뭘 예상해야 할지 모른 채 산속을 헤매듯 도착한 곳에서 수십 마리 털 뭉치들 사이 유난히 작은 한 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내쪽으로 뛰어왔다. 유리벽을 짚고 서서 날 알아보기라도 한 듯 커다래진 그 두 눈에 내 눈을 맞추었다. 혼란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찾았다, 내 사랑. 잉크를 만난 날이자 삶이 불현듯 방향을 바꾼 날이었다. 머릿속에 그렸던 모습과는 달리 까만 털에 흰 눈썹이 땡땡 박힌 얼굴이었다. 찐구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러고 나니 눈앞의 아이가 무리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 오랜 세월 그리워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손바닥만 한 몸을 들고 밤톨만 한 얼굴을 살펴보며 찡하고 감격스러웠는데 그 순간은 지금도 자다 깬 잉크를 품에 안으면 고스란히 떠오른다.
분명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었는데, 잉크가 조용한 방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거나 삐져나온 카펫 실을 물고 요리조리 뒹구는 모습을 볼 때면 역시 쓸쓸하겠지 걱정이 되었다. 친구 삼으라고 페럿을 한 마리 더(오트), 갈 곳 없다는 고양이 새끼를 한 마리(젬마), 또 젬마가 심심할까 봐 다른 길고양이 새끼를 한 마리 더(코리), 예전 그 사진에서 본 페럿과 똑 닮은 모습의 페럿을 한 마리 더(에버) 데려오고 나니 어느새 두 달팽이 외에도 아기 페럿 세 마리와 아기 고양이 두 마리를 돌보는 상황이 되었다. 계획에 없던 대가족이었지만 보호자로서 분명한 계획이 하나 생겼고, 그건 내게 허락된 모든 시간을 아이들에게 할애하는 것이었다. 퇴사 면담을 신청했다. 왜 회사를 관두려느냐는 질문에 동물 식구들과 더 붙어 있고 싶다고 하니 디렉터는 고맙게도 이렇게 얘기해주었다. "그래, 시간이 소중하겠다. 우리 강아지가 얼마 전에 떠났거든."
오늘 우리 집엔 줄이, 점이, 잉크, 오트, 젬마, 코리, 에버, 그리고 나까지 여덟 식구가 함께이다. 간혹 사람들이 누가 제일 예쁘냐 물을 때면 망설임 없이 잉크라 말하지만,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애틋함을 하나하나에게 느낀다. 매일 아침 눈 뜨면 이불 개는 파티(침대 위 이불을 갤 때 모두가 그 밑에 모여 뒹굴고 당기고 콩콩 뛰며 신나 한다)를 시작으로 한바탕 같이 놀고, 먹고, 싸우고, 그러다 혼나고, 다시 놀고, 또 약속한 듯 한꺼번에 잠드는 사이사이 잉크와 나, 오트와 나, 젬마와 나, 코리와 나, 에버와 나.. 그렇게 우주에 둘 뿐인 순간들도 늘 있다.
한 사람 살기 딱이라는 추천에 구한 곳이었는데 문득 잠에서 깨니 이 작은 집이 온통 쌔근쌔근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소리들로 가득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식물들까지 흥얼대는 듯 마치 복합적이고 웅장한 교향곡을 듣는 것처럼 황홀하다. 잔병치례가 잦다고 들어 키우기 전부터 걱정이 많았던 페럿들도, 달고 왔던 허피스가 악화돼 일주일이나 스스로 먹지 않아 위태로웠던 고양이들도, 낫고 나면 이전보다 더 건강한 상태가 되어 풀 에너지로 온 집을 뛰어다녔다. 생명력이란 게 얼마나 강하고 위대한 것인지, 하지만 얼마나 기한적인 것인지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르는 동시에 초조해진다. 페럿의 평균 수명은 7.5년, 애완용으로 개량된 페럿의 수명은 길어야 7년이며 3살부터 노화가 시작된다. 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15년, 5살 즈음부터 노화가 시작되고 개의 경우 개체차가 크지만 평균 11년, 역시 4-5살 즈음부터 노화가 시작된다. 찐구가 그렇게 죽지 않았더라면 작년이나 재작년쯤 제 명을 다 하고 세상을 떠났거나 더는 잘 걷지 못해도 매일 산책을 기다리는 13살의 노견이었을 것이다.
7년, 11년, 15년, 몇 년이든 사람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는 짧고 집약적인 삶이다. 나는 잠깐 회사를 다니며 지난 3년을 보냈는데, 앞으로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 집 장난꾸러기들 모두 중년기에 접어들어 침착해지고 그만큼의 시간이 한 번 더 지나고 나면 페럿들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고양이들은 하염없이 창 밖을 보거나 하루 종일 소파에서 잠을 잘 것이다. 내가 아는 강아지들 여럿도 세상을 뜨고 나머지 또한 지금과는 딴판의 모습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겠지... 계산을 하다 보면 아깝고 안타까워 밥 한 끼도 대충 주고 싶지 않다. 수명을 드라마틱하게 연장하는 방법은 없다고 한다. 특이하게 오래 사는 개체가 있을 뿐, 최고의 식사를 제공하고 사용하는 모든 용품을 멸균 처리한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키우는 동물의 본질에 대한 공부를 멈추지 않으며 마련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종 적합한 형태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얼마를 살더라도 기본이 충족되는 삶을 살기를 그리고 추후에 긴 시간 고통받는 죽음을 부디 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반려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실질적인 노력이다.
<사랑의 표현>
01. 비극일까 희극일까
02. 작은 집 안 더 작은 집
03. 숨의 화음
04. 생닭을 사 왔던 날
05. 막내 이모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