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25일 thread에 쓴글
저는 지금 목욕탕에 가려합니다. (지금 시각 am 05:10)
전에 우연히 온천탕에 갔다 왔더니, 피부가 너무나 빤딱빤딱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이게 뭐지' 싶어 다시 가봤더니, 우연이 아니란걸 알았어요. 목욕탕 물이 해수물에 미네랄이 어쩌고... 아무튼 좋은 물이었다고해요. 정말 피부가 좋아지니, 또 이따금 생각나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욕탕만 가려고할 때면 심장이 쿵쿵 긴장이 됩니다.
가끔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께서 포진해서 말을 걸고, 또 걸고, 옷갈아입을 때도,
머리 말릴 때도 계애~속 말을 거시거든요.
"몇 살이요?" "요즘 춥제?" "결혼했나?" "팔에 흉터는 뭐고?" 끝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늘 조용히 과묵하게 다녀옵니다.
씻을때도 목욕탕 제일 구석을 찾아가서 벽을 보고 샤워해요. 머리를 감을때도 물줄기를 맞으며 거의 벽에 밀착해서 벽과 하나되어 씻습니다. 양치도 거울에 최대한 붙어서 하고 거의 벽의 일부가 되어버려요.
사실... 이유가있어서요..
다시 한번... 그때를 기억해봅니다.
그날도 목욕탕 자리가 넉넉했는데 저는 평소처럼 구석에서 귀신처럼 머리를 감고 있었어요.
물은 저를 때리고, 긴머리를 감던 중,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것 같은 존재감이 느껴졌어요.
눈을뜨고 슬쩍 봤더니, 많은 자리들을 놔두고 제 바로 옆에 한 아주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아, 뭐 그럴 수 있지.' 싶었는데, 그 느낌 아시나요? '뭔가 말 걸것 같은 느낌!'
눈이 딱 마주쳤는데 아주머니께서 갑자기
"야야, 여기는 비누를 안 준다~!" 이러시는거에요.
저는 짧게 "아 네, 안 주더라고요. 비누, 샴푸 다 개인이 챙겨야 해요.수건만 줘요."했습니다.
아주머니는 "그럼 여기 비싼 편이네. 뭔 비누도 안 주노." 이러시며 푸념을 쏟아내셨습니다.
아, 이거 길어지겠구나 싶어 '헤헤헤'하고 영혼없는 웃음으로 넘어갔어요.
그리고는 한창 씻고있는데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서 슬쩍 보니, 멀찍이 탕 안에서 그분이 머리만 쏙 내밀고 눈을 부릅뜨고 저를 쳐다보고 계시더라고요. 사실 제가 아니라 제 앞에 놓인 1리터짜리 대용량 바디샴푸를 빤히 보시는 것 같았어요. 아주머니가 다시 씻으러 오시길래... 저는 바디샴푸 혹시 쓰시겠냐고 물었어요. 아주머니는 "어이고, 고마워라." 하시며 바디샴푸를 슥- 자기쪽으로 가져가더니 갑자기 푹푹푹 눌러서 쓰시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두 번이 아닌 다섯 번, 여섯 번, 열 번씩 아주 팍팍! 눌러 쓰시는거에요.
타올에 바디샴푸 디스펜서를 아주 팍팍 푹푹푹! 눌러가며 거품내고 또 북북북!
저는 머리를 감다가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슬쩍 내밀고 보니,
'와, 저거 다 쓰시겠는데?' 싶었어요.
아주머니 포스가 뭔가 보스 느낌에.. 20년차 국밥 맛집 사장님같은 포스였어요... 바디샴푸를 쓰는 손놀림이 "저기! 고기, 더 넣어! 더! 더! 아주 팍팍!"이라고 말하며 거하게 쓰실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이거 향좋다~" 이러면서 제 바디샴푸를 연신 칭찬하며 계~속 푹푹푹 - ! 북북북 ! 눌러대며 쓰고 계셨죠. 디스펜서가 살려달라는 것 같았어요. 아주 거침없이! 이 바디샴푸로 오늘 내 한평생의 때를 모두 벗겨내겠다는 기세였어요.
그런데, 그때 다른 아주머니가 휙 지나가며, "여서 뭐하노?" 하시길래 고개를 돌려보니, 비슷한 무리의 아주머니들 네분이 제주변을 포위하듯 목욕탕 한켠씩을 차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 바디샴푸를 네분이 돌려가며 푹!푹푹! 눌러대며 쓰기 시작하는 거에요. 자세히보니, 한분 쇄골에 문신이 있고, 한분은 가슴에, 다른 분은 등짝에는 거대한 봉황이 날아다니는 듯한 문신이 있더라구요.
저는 이분들이 혹시 그 말로만 듣던 '칠공주'인가..?싶었어요.
"저희 이렇게 많이 써도돼요^O ^??"
이미 많이 썼고, 앞으로도 많이 쓸테니 예의상 물어본다 이건가요.
칠공주에 긴장해서 "네... ;;" 하고 배시시 웃으며 저는 비겁하게 물러났습니다....
바디샴푸로 뭔가 삥뜯기는 기분이었어요. 한 분이 "고등학생이요?" 물으시길래, "아뇨, 저 성인이에요!" 했더니,"아이고야, 여고생인 줄 알았다."라고 말하더군요. 무슨의미였나 싶지만 기분이 참 더럽더라고요. 여고생 바디샴푸는 푹푹 팍팍 눌러써도되나.! 그후로 저는 이렇게 꼭두새벽에 목욕탕에 가고 있습니다. 바디샴푸도 모두 소분해서 다니네요. 이 새벽엔 칠공주가 없거든요.
스스로가 인색한거같으면서도..
긴장도되고..;;;;
목욕탕 자리 고를때도 은근한 기준이 생겼답니다.
1. 자리에 플레인요거트 같은게 있으면 절대 가까이 가지않는다.
-얼굴이나 등같은데에 막 바르시더라고요.
2. 돗자리 가져온 사람 피한다.
3. 온천탕에서 바나나, 귤, 계란 까먹는 사람 근처 가지않는다.
4. 날계란으로 팩하는 사람
5. 사교성 높아 말을 걸 것 같은 사람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또 생긴 습관이 하나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옆에 다가오면, 저는 눈을 감아요.
비누가 눈에 들어가서 따가운 척하고, 눈을 꾹 감고 계속 씻어요.. ...;;
온천탕이 피부엔 좋지만, 정신 건강엔 약간 해로울 수도 있겠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