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남자를 돌하르방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누가 "어? 거실에 돌하르방이 있네요?" 하고 물으면,
나는 늘 “아니요, 저건 우리 아빠예요!"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빠는 그정도로 말수도 적고, 감정표현도 거의없는 정말 돌처럼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었다.
움직임도 크지 않고, 늘 ‘일시정지’ PAUSE 상태였다.
아빠는 외과의사로, 하루일과가 늘 군대처럼 규칙적이었다.
새벽5시 알람이 울리기도전 눈 번쩍! →샤워 →원두커피 내리기 →6시전 출근,
밤에 퇴근 →밥/샤워→취침, 군대생활을 철저히 고수하는 돌하르방이었다.
나는 '아빠'라는 존재를 ‘돌’이라는 형태로 각인해왔다.
어린 눈에도 ‘사람’보다는 '로봇'이나 ‘돌’에 훨씬 가까웠다.
난 이런 돌하르방이된 아빠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심각하게 샘솟았다.
‘돌이, 깨지나 안 깨지나 두들겨 보고 싶다’는 마음...
여러 시도를 했다. 아빠 가방 깊숙이 민트치약을 넉넉히! 아주 두둑히 짜두면, 며칠 모르다가, 치약이 눌러붙을쯤 기억나서 때마침 가방을 여시고 “으악, 뭐야 이거!!?” 하고 소리쳤음좋겠다!? 하며 기대했지만,
반응은 늘 똑같았다. 아빠는 흐린눈으로 "가방에 치약이 왜 있지?휴.” 짧은 탄식 한마디 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가방을 씻고 잽싸게 가버리는 차가운 돌하르방.. 아우!
아빠가 반응이 없자, 나는 정말 큰 장난을 준비 중이었다.
저금통을 털어 편의점에서 포도 젤리를 몇봉지 사와, 엄마가 만든 김치볶음밥에 속에 몰래 잘게 잘라 속속! 넣고 비볐다.
한입 드신 아빠.
돌하르방이 젤리볶음밥을 삼키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썹만 미세하게 움직일뿐.!
‘어서 아빠안의 제주도를 보여줘~!!'
용돈도 털었는데 무반응이 너무 속상했다.
이렇게 웬만해서는 깨지지도 않는 완벽한 돌하르방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Mom!
엄마는 집안에서 소문난 '장난의 신'이었다. 장난 수위가 좀 높았기때문에.
어린내게 좀 충격적이었던건 '수건춤'이다.
아빠가 샤워를 마치고 “수건 좀 갖다줘!”소리치면 엄마는 수건을 조용히 들고 화장실 문앞에 서서 수건을 슬쩍 내밀다가 아빠의 젖은 손이 수건을 잡으려는 찰나, 확! 빼버리곤했다.
“아 진짜, 장난치지 말고 줘!” 아빠가 소리치면,
“알았어, 알았어, 이번엔 진짜 줘!”하며 수건을 다시 내밀다가 아빠의 손이 닿을 듯한 순간,
또 다시 확! 빼버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수건을 머리 위로 쳐들고, 치어리더처럼
“수후건~ 수건이~ 왔어요!~수후건이~ 왔어요!” 노래를 부르며 사정없이 수건을 휘두르며
광기의 문워크를 하기시작했다. 스무스~스무스.
그제야 돌하르방은 화장실문 안쪽에서 웃음을터뜨렸다.
“그만해 좀,;지금 물 뚝뚝 떨어진다고!;;”
눈을 의심했지만 수건춤을 지켜보며 나는 생각했다.
"뭐든 흔들거면 제대로 흔들어야해!"
엄마의 이런 행동들은 돌하르방 무뚝뚝 버전을
[ 허허허ver2.0 ] →[ 크크ver3.0pro ] →[키득키득ver4.0]� 모드로 업그레이드시켰다.
아빠는 엄마로인해 돌같은면이 조금씩 깨졌다.
사실 엄마는 '무표정한 선비의 입꼬리를 상승시켰다는' 전설적인 증조할머니로부터 장난기 DNA를 물려받은 유서깊은 가문의 후손이다. 말하면 길지만 할머니도 엄청났다.
그렇게 아빠를 보면서 나는 어쩌다 세상 모든 남자 보기를 돌하르방 같이했다.
또 엄마는 의외로,
1. 남자를 멀리하라.
2. 남녀칠세부동석
3. 외박은 결혼전까지 절대안된다.
4. 통금시간 밤 11시.
5. 데이트시 위치보고
이 5가지 가르침을 너무 강조했다. 내 연애관도 그렇게 사실상 조선시대같이 굳어져있다.
친구들이
“내 남친, 너무 무뚝뚝해…” 하면 → '돌하르방이군.'
“어제 싸웠는데, 아무말도 안해!." → “여윽시 돌하르방!”
“연락이 너무 없어..일때문에 자꾸 바쁘대". → “제주도산 고오오급 돌하르방인가!?” 쯤으로 생각했다.
헬스장에 다닐 때도, 갑자기 남자트레이너가 어슬렁 다가오면 "이 돌하르방은 역삼각형이다."라고 생각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보니 스무살 연애를 시작했을 때도 나는 굉장히 ‘플라토닉’했다. 감정이 들끓거나, 설렘도 없고 '쿨쿨'..'무념무상~'.. '이 돌하르방은 또 어떤 유형일까'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남자친구 손이 내 손끝이라도 스치면!! 나는 놀라서 진지하게 사과했다.
"어 미안, 물리적 접촉은 심리 정서적 영적 교류의 3단계에 도달해야하는데, 실수했네..미안."
" 우린는 영혼이 먼저 잡혀야하는데…” 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여 놓았었다.
남자친구는 오히려 나에게 '돌하르방'이냐 되물었다.
어느 날, 남동생이 진지하게,
“누나, 난 누나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으면좋겠어.”라고 말했다.
"왜? 누나도 혹시 돌하르방 같아..?"
“아니, 그냥 세상에 나쁜 놈들도 진~짜 많거든. 누나 너무 착해빠져서 이상한 놈한테 걸려들어서 힘들어질까 봐 걱정돼. 세상에 티 안내도 이상한 남자, 나쁜trash들 진짜 많아.”
남동생의 진지한 얼굴을 보는데, 당황했다.
결혼도 일찍하고 올케와 조카와도 정말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왜이런 말을 했을까.
나중에 혼자 제주도로 이사가서 좋은사람처럼 생긴 돌하르방 하나 사서
집앞에 세워놓고, 한라봉 주스 와인잔 마시며
돌하르방이랑 짠~하고
"크으~ 이게 인생이지^^?" 하고 살으라는건가.
아빠도 버전이 업그레이드 되어왔는데.. 엄마의 수건춤 덕인것같다!
엄마의 광기어린 수건춤.. 돌을 돌이 아닌 사람으로 만들기위해
예술의 경지에 오른 생활 밀착형 처세술이었나 싶다.
엄마가 어릴때 나를 무용학원에 어거지로 보냈다.
수건춤 배우라는 깊은 뜻이 있었을지 모른다.
집에 있는 수건을 모아 거울 앞에서 연습해볼까.
-2월28일 thread에 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