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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고한 인간입니다.

by La Verna

한때 나는, 꽤 오랫동안 신비롭고 품격있고, 우아한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신비롭고 품격있는 인간'이라는 완장을 차고, 세상과 약간 거리감마저 유지해야한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지금까지 술과 담배는 ‘추태’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단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았고,

친구들과 클럽에 가는 일도 ‘저열한 취미’라는 꼬리표를 달아 철저히 외면해왔다.

‘숭고한 정신’을 기른다는 명분하에 출장 중에 지구 곳곳에 살면서도, 현지 맥주 한 모금조차 허락지 않았다. 20여년간 숭고하게 치켜올렸던 내 신비주의..

삶을 거의 박물관의 전시품이나 높은 곳에 있는 먼지처럼 아오라를 내뿜었다.

"만지지 마시오, 고고한 인간입니다."

주변에서는 종종 '점잖고 우아하다'라고 나를 평했고, 그말에 취해 점점 더 고고한 먼지가 되어가며 만족했었다.

말투는 점점 더 느릿하게, 조용히(안그래도 작은 목소리인데 더 딥하게), 행동은 더디게, 철저하게 무게감을 유지하고, 경박함이라 여겨지는 것들은 가능한한 멀리하며 '품위'라는 수갑을 스스로 채웠다.


하지만 나는 30대에 들어와 이 철학을 업그레이드했다.

어느날, 번개같이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인간이다. 신이 아니다. 내가 왜 신을 연기하는가?'


이 질문 하나가, 내가 세워 두었던 모든 ‘신비주의 성벽’을 흔들었다.

신이 아님에도 신비를 연기하느라 나 자신을 얼마나 옭아매고 있나.

언젠가 내가 노년에 나이들어 요양원에 갈 때, 이 과잉 신비주의를 끝까지 고수한다면 내게 얼마나 괴상 망측하고도 외로운 노년이 펼쳐질까?


신비주의 할매가

요양원 침대에 드러누워있다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 아픈 티는 내지 않고, 도리어 은은한 미소와 함께

“전 괜찮습니다. ^ ^”



...... 아, 신비롭다.


"저 할머니는 똥에 금가루가 섞여 나올 것 같아요! 방귀에서 라벤더 향이 날것 같아요.

방귀뀔때마다 신이 강림하는거 아니에요?" 와 같은 찬사(?)를 들어야 할 운명이다.

요양원 침대에서도 기품을 유지하느라,

"엑스레이 촬영이요?

거부할게요^^,... 전 우아해서요. 제 통증은 '제 존재의 신비'예요."라며

속으로는 죽도록 고통스러운데 우아한 표정 지어야한다니, 이게 무슨 중세 고문이야..


평균수명 백세이상 살게 된다면, 치매로 혼미해진 정신으로도

"내 기저귀는 24K 금실로 짜 주세요" 라며 진상 부릴듯한 모습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진다.


늙어서 지팡이 주문 시 "호그와트 직배송인가요? 지팡이는 해리포터산 마호가니 원목으로, 문구는 라틴어로 새겨주세요. 아니면 손도 대지 않겠어요!" 라고 우아하게 으름장을 놓을지도 모른다. 이런 나를 보며 요양보호사들은 뒤에서 속삭일 것이다. "윙가르디움 레비오사! 오늘도 저 할매, 지팡이로 약봉지 공중부양시켜서 먹으려나 봐.낄낄낄."

내 신비주의의 최종은 요양원에서의 자아도취적 환각인 셈이다.


너무 늙어 요양원 침대에 누워 수전증으로 떨리는 손으로 턱받이를 거부한다.

"이건 내 신비를 모독하는 퀄리티에요!

제 신비를 뒷받침해줄만한 턱받이 수건으로 맞춤 제작해주세요."

얼마나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상황이될까?



이 신비주의의 종착이 '고독사'라면,

"이분은 끝까지 품격있고 우아하게 지내셨어요~ 너무 신비로워서 아무도 말도 걸지 못했죠. 홀로 '고급스러운 외로움'을 씹다 돌아가셨어요. 천국도 신비롭게 가셨을거에요" 와같은 부고멘트가 나올까 무섭다.


사람은 곧 먼지같은 존재이다. 그래도 인간미를 섞어서 '괜찮은 먼지'가 되고싶을뿐.

품격있게 살겠다고 애쓰는 건 좋지만,

너무 신비로우면 나이들어 가족들도 생각보다 일찍 "좋은곳이래요~^^" 하며 슬그머니 요양원입소 리플렛을 내밀지도 모른다. 인생은 적당히 신비롭고 적당히 인간적인 먼지가 되어, 요양원갈때 지팡이 대신 온기가 있는 손이라도 꼭 잡아줄 사람이 있는 편이 훨씬 낫다.


사실 신비로움이 '혼자만의 환상'일 수도 있다.

인간은 사물이 아니라 먼지일지라도 서로 부딪히고 섞이며 사는 존재이다.

빛나는 오로라가 먼지충돌에서 나온다는 사실처럼, 이제는 적당히 부딪히고 적당히 반짝여보련다.

어차피 다들 똑같이 방귀뀌고 똥누는데, 너무 신비주의로 고고해봤자

'외로움의 극치'를 찍고 황금실로 짜여진 기저귀나 요구하는 꼴이 될 뿐이다.


엄마는 참 유쾌한 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부분에서는 굉장히 엄격하셨다.

어릴 때 내가 “엄마!! 누가 똥 싸러 갔어?”라고 말하면,

엄마는 즉시 태도를 바꾸며 단호하게 혼내셨다.


"똥을 ‘싸다’라니!!! 그런 표현은 개나 고양이, 원숭이 같은 동물한테나 쓰는 거야. 인간은 ‘누다’를 쓰는 거야!"

그리고는 눈을 덩그렇게 뜨며,

"어서 다시 말해 봐. 똥. 누.다!"

평소에는 늘 장난스럽고 재미있는 분이었지만, 이런 언어의 품격(?) 문제만큼은 절대 타협이 없었다.


But, "이제는 체통을 지키되, 누가 말도 못 걸 정도로 신비로워지진 않을거야!"라고 다짐해본다.

어차피 체력 떨어지면

신비주의 유지보다 혈압유지가 더 시급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체통'과 '인간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외줄타기를 시작했다.


당연 사람은 다 트림하고, 방귀뀐다고 하지만 "나는 인간미 넘쳐!" 하며 아무 데서나 터트릴 순 없다.

먼지들이 충돌해서 나오는 아름다운 현상이 오로라라면,

기왕 충돌하는 먼지가 될 거면 적당히 빛나는 오로라 먼지로 살겠다. 신비주의에 너무 매달리지 않고, 가끔은 '적당히 팍! 망가져 주는 품격'을 갖추며.

'신비롭고 우아하다가 외롭게 소천한 사람'으로 흑역사에 남고 싶진 않기때문에.


그렇다고 또 신비주의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인간미를 과하게 드러내면,

오로라의 먼지가 아니라 '미세먼지 나쁨 주의보' 발령받는 유해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신비주의를 완전히 버리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빛나는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살며, 가끔은 충격적인 모습도 보여주며 "내가 생각보다 별거 없는 먼지야. 살짝 오로라처럼 반짝이는 것도 그냥 진동이야"라고 웃어넘길 수 있는 존재.


인간은 비슷하다. 품격을 유지하다 고혈압이 오고, 신비롭게 버티다 관절이 나가면 황금지팡이가 무슨 소용일까? 중요한 건 너무 신비롭지도, 너무 인간적이지도 않은 적당한 균형이다.


나이들고 보니, 신비주의보다 사람 사이의 온기가 느껴지는 교류가 훨씬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됐다.

완전히 망가지고 싶지는 않으니 '선은 지킨다' 싶은 정도의 체통은 남기기로 했다.


신비주의 100%에서 50%로 낮추고, 나머지 50%는 인간미로 채우니 한결 편해졌다.


내기준, 충돌할 때 오로라가 되는 먼지!

• 신비주의 50%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땐 여전히 "이 커피...모슈코프스키 모리츠의 작품 58-3번을 연상시키는 산미야"라고 중얼거린다.


• 인간미 50%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어헝~ 이게 인생이지!" 하며 트림을 우아하게 “끄억~~” 토해낸다.


종합: (신비주의50%+인간미50%)

트림을 하되, 베토벤의 음계로.

적당히 품격과 인간미 사이를 오가는 밸런스. 어차피 인간은 한 줌의 먼지로 끝날 테니, 그 트림 소리마저도 베토벤의 ‘운명’처럼 웅장하게하면 된다.


인생은 너무 빛나지도, 너무 탁해지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인간적이고 솔직한 정도의 광채를 내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이것이 30대의 내가 찾아낸 신비주의의 매력이다.

사람은 먼지, 한줌의 재가 아니던가.

적어도 다른 먼지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려 오로라처럼 빛나는 순간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언제라도 바람에 흩날릴 준비는 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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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7일 thread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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