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越(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닐을 쓰고 세상을 본다.
이 비닐은 투명하고 얇아서, 미묘하게 세상을 왜곡시킬 수가 있다. 하지만 문제되지 않는다. 다 그렇게 살아간다. 문제가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비닐이 내눈을 덮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자신이 '가려진 시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이다.
친구가 “오늘 신림역에 갈거야”라고 말했다.
이걸 듣는 순간, 나는 두 가지의 시선으로 나뉜다.
1. 비닐을 벗은 채 들을때,
– “아, 신림 가는구나.”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임)
2. 비닐을 쓴 채 듣기
– “신림 진짜 가는 거 맞아? 딴 데 가는 데 거짓말하는거 아니야?” (불신의 비닐)
ㅡ “신림? 좀 애매한 곳인데…왜가?” (편견의 비닐)
ㅡ “거기 가서 뭐 하려는 거지?” (과잉 해석의 비닐)
하루에도 여러 비닐을 갈아끼우고 있다.
같은 말을 듣고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각자 다른 비닐越(월)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라면,
이 비닐을 완전히 벗겨내기는 불가능이라고 생각한다. 벼락을 맞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겪은 경험과 감정의 필터가 비닐이 되어 이를 거쳐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불완전한 인간의 처지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재단하기를 의식적으로 나는 거부하려는편이다. "내가 어떤 비닐을 쓰고 있는가" 를 찾는것이 더 시급하다. 이를 자각하는 순간, 비닐을 벗겨내기가 쉬워진다.
그리고 때로는 일부러 다시 써야 할 순간도 있다는 것. 세상이란 온전히 투명한 상태로 보기에 너무 날카롭고, 차갑고, 복잡한 곳이다. 조금의 비닐越(월)은 우리를 보호해 주기도 한다. 그러니, 비닐을 벗길 것인지, 잠시 덮어둘 것인지는 알아서 선택하면 된다. 나의 비닐들을 알게되면 타인이 쓴 비닐이 무엇인지 보여도 그것을 덮어 둘 아량이 생긴다. 다만, 선택할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은 것 같다.
"나는 지금, 있는그대로 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