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퇴근하고 테니스 연습을 마치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비를 툭툭 떨구기 시작할때 쯤, 인간적으로 나는 피곤이란 단어로는 도저히 커버가 안 되는 상태였고, 우산도 없었다. 이건 그냥 택시 타고 집가라는건가보다 하고 콜택시를 부르려던 순간— 같이 테니스 모임에서 연습하던 지인 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집 방향이 비슷한 것 같은데 태워드릴까요?" 라고 했다.
순간 택시도 안잡히는데 "휴, 다행이다." 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차를 얻어 탔다.
그런데, 어라.
가던 방향에서 갑자기 핸들을 휙 틀더니, 방향을 바꾸어 예상치 못한 길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조금씩 높아지는 경사길, 낯선 오르막을 타고 차가 천천히 올라가더니— 벚꽃이 어이없게 만개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길을 보며 "엇,..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했더니
그분은 창밖을 보면서 한 마디.
“그 느낌 알아요?”
“어떤 느낌이요?”
"벚꽃이 너무 이뻐서, 너무 보고는 싶은데, 혼자 보긴 죽도록 싫은 느낌이요^^"
순간, 나는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와서 정신은 이미 반 좀비 상태에 엄청난 피로와 싸우고 있는데, 이 당혹스럽고 약간의 공포섞인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지금 보러 가시는 거예요..?" 했더니, 그분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지금 제가 OO씨 납치한 거예요."
무슨 잠재적 시인에 사이코패스 사이에 그 어딘가 이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싶었고,
홀로 감성이라는 이름의 풍선을 불며 진지하게 벚꽃 아래를 내달리고 계셨다.
내가 너무 심하게 피곤해서 벙찐 얼굴로 쳐다보자, 갑자기 여유롭고 느끼한 미소를 날리시더니,
"납치당한 분치곤 너무 조용하신데요...^^"
……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고 이러다 감성으로 사람 잡겠는데 싶어서
나는 현실 감각 복귀을 위해
들고 있던 텀블러 빨대를 입에 물고 아무말없이,
“후루룩후루룩후루루루루루룩 후루룩후루룩후루룩———”하며 싸이렌급 흡입음을 냈다.
그 상황에선 정말 응급 싸이렌 버튼이 필요했다.
조용한 차 안에서 빨대로 텀블러 바닥 긁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크고 건조하게 퍼졌다.
그리고는 물마시다가 조용히 정면을 응시한 채, 아주 평평하게 말했다.
"전 혼자 보는 거 오히려 좋더라고요! 얼마나 좋아요. 방해도 안받고.
얼마전에도 혼자 벚꽃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
말끝에 다시
"후루루루룩—" 진심을 다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빨았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너무 심술보같다.
그런데 하이라이트는 그때 시작이었다. 갑자기 음악을 틀더니, 창문을 스르륵 내리고,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갑자기 외치셨다.
"자~ 여기가 벚꽃 터널입니다~~!"
톤이 정말.. 혼자 엄청 신나셨다. 나는 눈에 다크서클 두 겹인데다 체력은 방전이고, 눈은 반쯤 감겨 있는데, 그분은 갑자기 말도 안 되게 신나서.. 혼자 벚꽃감성 심취해계셨다..
"사진 찍으시죠!"
하시며 차까지 세우시는데, 진심 피로가 극에 달해 살짝 눈물 날 뻔했으며,
내면에서 조용히 분노가 차오르는 찰나—
벚꽃잎들이 제 각기 스핀을 하며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이 눈에 펼쳐졌다.
벚꽃은 막 만개했고, 하늘에서 조용히 빛이 쏟아지듯 잎들이 영화속 장면처럼 흩날렸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 무의식적으로 말해버렸다.
"아... 진짜 예쁘네요."
예뻤다. 꽃들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아름답게 흩날리고, 벗겨진 마음에 뭔가 스르륵..
순간 내가 조금 전까지 얼마나 투정 섞인 말투와 날 선 태도로 일관했는지 떠올라,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나치게 피곤해서, 메말라버린 시선 때문이었다고— 그렇게 조심스레 핑계를 대본다.
벚꽃터널이 원래 이렇게 이쁜거야? 마음이 살짝 풀어지며 잠시 감성 돋고 있는데, 폰 알람이 울렸다.
[ !!오후 10시 취침 알람!!! ] =‘띠링띠링~딥슬립 준비하세요!’
…어우. 지금 저 오늘 일찍 자려던 사람인데요. 잠자리에 누웠어야 할 시간에,
낯선이와 벚꽃 감상 중인 나.
벚꽃잎 날리는 창밖을 보며 문득 내 인생도 같이 흩날리는 느낌이었다.
감성, 종료.
현실, 복귀.
그렇게 나는 다시
감성과 현실, 벚꽃과 다크서클 사이 어딘가에서
정신이 아득한 채로 있다가
집에 돌아왔다.
다음날인 오늘 깨달았다.
어제의 내 말과 표정이 얼마나 투박하고 각졌는지.
벚꽃이 그토록 찬란했음을 생각하면, 보이지 않았던 건 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삐뚤게 기울어 있었던 건지도.
이 벚꽃 사진은 어제 내가 얼마나 피곤했는지 말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