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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엿한 성인이다!

딸기우유는 졸업했슴다

by La Verna

나는 어엿한 성인이다.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독립적인 인간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할 줄 알며, 세련된 취향도 갖췄다...라고 생각했는데, 집에만 가면 모든게 무너진다.

엄마아빠를 만나면 내가 나름 유지해온 나만의 사회적 위상이 깨진다. 내가 인정하는 최강의 빌런은 가만보면, 집안에 있는것 같다. 이길 수 없는 최후의 보스,엄마아빠다. 특히 본가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나의 페르소나가 와르르 무너진다.그들은 나보다 먼저 나를 봤다. 내가 ‘기억도 못 하는 나’를 전부 알고 있다. 내가 아기였을 때, 말 못 하고 감정 조절도 안됐던 덩어리를 쭉 관찰해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기다렸고, 나는 의식도 희미했던 원시인 상태였지만, 부모님은 내인생 ‘최초의 데이터 베이스’를 탑재해 영구히 보관하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인생을통해 갈고 닦은 숭고한 기상과 황제와 같이 여기는 위엄은 부모님 앞에서 즉석 개콘(=개그콘서트)으로 전락한다.

내가 애써 어른미(美)를 풍기며 품격있게 행동하려고 아우라를 풍기면, 부모님은 풀세팅된 ‘야생의 나’를 소환해, 순식간에 김치국물 튄 너덜한 런닝셔츠나 내복 느낌으로 바꿔놓으신다. 아무리 내가 세련된 어른이 되고,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를 연마하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도, 부모님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엄마아빠는 나의 모든 ‘버튼’을 손바닥처럼 꿰뚫고 계신다. 이것은 초기화도 안되고, 업데이트도 없다.

예컨대, 내가 “나는 이제 독립적인 성인으로서 보다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대화할 것이다”라고 다짐한 순간, 아빠가 아무렇지 않게 딸기우유를 건넨다.

"딸아, 이거 네가 좋아하던 딸기우유~ 빨대 꽂아놨다~허허허.”

이 아빠의 치명적 스킬 한 마디에, 내 어른 코스프레는 균열을 일으키며 붕괴되고 '원시버전의 나'로 리셋된다. “아빠, 저는 이제 롱블랙 마시는 도시적인 인간이 되었어요. 이제 전 에스프레소의 바디감과 산미를 논하는 세련된 사람이에요!”라고 외치고 싶지만...딸기우유가 등장하는 순간 -손은 이미 딸기우유를 받아들고 반사적으로 꿀꺽! 한 모금 마시고는 “뭐야? 이거, 아직도 맛있네?” 젠장.!

그렇게 치트키 버튼을 누르듯 한 방에 나를 웨딩피치보며 방방 뛰던 그 7살짜리 리틀 나로 리셋해버린다.


“저기요? 왜 저를 자꾸 마음대로 구버전으로 롤백하시나요?”


엄마아빠는 “너 예전에 이랬잖아”라는 말 한마디로 나를 초기화시켜버리신다. 순식간에 2000년대 레트로 감성의 꼬맹이 버전으로 쭈그러든다. 절대 이길 수 없다. 부모님 앞에서의 나는 절대 세련된 최신 인간이 아니다. 출고당시 설정 그대로 살아야한다.이런 압도적인 ‘부모의 고증’ 앞에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새롭게 거듭난 나를 설득해야 한단 말인가? 한때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친구들과도 진지하게 논했다.


“부모님이 우리를 아예 존경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그리고 도출된 결론은.. 부모님이 우리를 ‘감히’ 경외할 만큼 용돈을 드리는 것이다. “한 달에 용돈 900만 원씩 준다고 생각해봐. 부모님이 우리를 경외의 눈빛으로 우러러보다가 기억이 리셋되실 거야.”

“아마 우리를 신으로 모시지 않을까?” 그치만, 부모님이 나보다 더 부자다. 이미 만렙인 부모님을 현질로는 이길 수 없다.. 이건 반칙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빌런이라니. 어떻게 이겨..


새로운 전략으로, 부모님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예를들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 부족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서로 언어장벽이 있다고 믿으며 대화를 시도해본다. 하지만 이내 현실을 깨닫는다. 스마트폰 너머로 “저녁 먹었어?”라는 질문이 도착하는 순간, 30년간 축적된 반사 신경이 작동한다.

“그럼!! 미역국!” 심지어 반사적으로 “근데 국이 좀 짜더라.”까지 말해버린다. 으..또 실패..나는 깨달았다.

부모님 앞에서 나는 결코 '새로운 나'일 수 없다. 그들이 기억하는 나의 버전은 최초의, 가장 강렬한 원본이기때문이다. 한 번 각인되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 돌에 새긴 글자 같은 것이다.

나는 이제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를 연마한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만, 부모님이 기억하는 나는 항상 똥기저귀를 장착한 채 거실을 전력 질주하며, 웨딩피치를 보다가 변신 장면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날뛰던 생물체다.

아무리 새로이 정의하고 싶어도, 부모님 머릿속에는 똥기저귀 차고 거실을 질주하던 시절의 나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새겨져 있다. 그들에게 나는 이미 내가 어떻게 변했든, 얼마나 자랐든 간에.. 시간이 멈춰 밥알을 흘리며 웃던 어린 날의 한 장면일 뿐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이 강렬히 내 발목을 잡는 ‘원시 버전’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발버둥일지도 모른다. 절대 삭제되지 않는 나의 원본! 타임머신은 부모님의 주머니에 있다. 강제 보존되는 최초의 기억!으아아아!!!


엄마아빠 앞에서도 도시적이고 세련된 어른으로서 근엄한 얼굴로 롱블랙을 들이켜도, 그들에게 나는 여전히 코흘리게 꼬맹이. 그렇지만 저기요! 난 어른이 되었어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주가 인정하는 부모님 투명망토로 덮어주기 보상법칙을 생각해본다. 부모를 끝까지 덮어준 이들은 이상하게도 인생이 잘 풀린다.

주변을 보면 너무 그렇다. 어떤 사람은 부모에게 많은 걸 받아도 불행하다고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부모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부모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왔어도 이상하리만큼 그 흠을 덮어준다. 투명 망토를 씌우듯, 부모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을 가려버린다.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삶에서 넘어질 때마다 어딘가에서 손이 뻗어오고, 예상치 못한 길이 열린다. 장애물이 생겨도 이상하리만큼 풀리고, 결과적으로 투명망토덕에 구제를 받는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사주나 미신을 믿지 않지만, 이 부분은 이상하게도 믿게 되었다.

‘부모의 흠을 투명망토로 덮어주는 순간, 하늘이 그를 유심히 지켜본다.’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위해 애쓰지만, 자식이 부모를 덮어주는 건 본능이 아닌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본 세상은 이상하게도 보상을 후하게 준다. 그래서 내가 만든 공식은 다음과 같다. "부모에게 잘하면, 그 몇 배의 포상이 인생에서 따라온다. 그리고 놀랍게도, 부모가 더 거지 같을수록, 포상도 더 크다." 부모님의 머릿속엔 과거의 내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부모님 앞에서 완전히 새로운 내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추억의 간식 포격.. 딸기우유만큼은 이제 안 주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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