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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모두가 고흐였다

by La Verna

한국인은

국민성 자체에 예술성이 깊이 깃들여져 있는 민족인 것같다.

특정한 예술 분야에 능하다기보다,

살아가는 태도 전반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예술적 감수성이 있다.

감정을 감지하는 방식, 분위기를 포착하는 눈, 말보다는 결을 먼저 읽는 촉 — 삶 자체가 하나의 섬세하고 정교한 감각으로 짜여 있고, 이것은 독특한 국민성같다. 그 감각은 예술가들이 지닌 것과 비슷하다. 예민하고, 집요하고, 섬세하며,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까지 이어지는 고도화된 예술적 본능. 예술가 특유의 집요한 기질이 다분히 내면화되어, 삶의 결 속에 뿌리내리고 있고 그 감각은 때로, 너무 깊어 우울질적인 기질로 연결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한국인은 숨 쉬듯 예술을 하는 민족이다.


한국인의 예술적 센스와 촉은 예리한 편이다.

미국이나 유럽 쪽의 어떤 개인주의적 고요와 달리, 한국인들은 ‘공진(共振)’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서로의 감정 파장을 촉각을 세워 캐치해낸다.

일상에서도 누군가 슬쩍 한숨을 쉬었다 싶으면, 어느새 그 울림이 단톡방 전체를 휘저으며 ‘오늘 좀 예민하신가?’라는 집단 관찰망이 발동된다. 그 민감성과 포착력이 아주 탁월하다.

화려한 것보다 살짝 어긋난 결, 조율되지 않은 공기, 미세한 긴장을 빠르게 감지하고, 그런 미묘한 틈 하나에 마음을 쓴다. 누군가는 “예민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혹시나 국민성이 가진 감각의 정밀도가 아닌가 싶었. 한국인으로 30년넘게 살아보니,

한국사람들 안에는 그 무엇도 대충 넘기지 않는 '정서의 눈썰미' 라는 예술가의 감각이 들어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눈썰미엔, 아주 은근한 독기도 있다.

누구든 겉으로 내색하지 않아도 이미 느끼고 있고, 느낀 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 그 행동은 때론 관계를 다듬는 섬세함으로, 때론 무언가를 새로 창조해 내는 추진력으로 번져간다.

적당한 질투, 비교, 경쟁이 때로는 엔진처럼 사람을 움직이게하고 추진시킨달까.

그래서 “아, 이 조화미 넘치는 한식 한 상차림, 이거 다 그냥 예뻐보이려고 만들어진 거겠지?” 싶어도 사실은

“어라, 저 친구보다 더 감각적으로 차려야 해!” 같은 작은 독기가 가득 담겨 있는 거다. 하지만 또 반전이 있다면, 그 빛나는 예민함이 결국에는 서로를 감싸 안는 정(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미묘한 ‘독기+정’의 콤보가 한국인의 집단 예술혼을 더욱 강렬하게 불태우는 비밀이 된 것 같다. 한국인들의 예민함과 독기가 빚어낸 이 특별한 매력은 어떤 형태로든 예술적 화력으로 발휘되고 있다.

이 예술적 감수성이 너무 뛰어나서 짊어지고 가야하는 국민성에 내재된 예민함은 방향만 잘 잡히면 창조의 엔진이 된다. K-팝도, K-드라마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증명되고 있는 듯 하다.

SNS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봐도 느껴진다. 감정과 온도를 조율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작은 큐레이션이다.

오늘의 분위기, 오늘의 빛, 오늘의 나를 담아내는 방식. 이런걸 보면 대부분이 무심한 듯 감각적인 생활을 보여주는 연출가들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런 민감한 감각이 자연에서 오지 않았을까.

한국이라는 땅이 가진 구조에서, 반도라는 공간, 사계절의 변화, 끊임없이 흔들리는 역사 속에서 감정을 외부로 발산하지 못하고, 내면으로 갈무리하는 방식으로 버텨온 시간들이
이 민족의 감수성을 고도로 정제시켜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예술성은 절대 느긋하지 않다.
모두 '긴장의 결과물'이다.

사계절의 흐름은 기상 변화가 아니라 감정의 촉을 발달시킨다. 겨울의 차가움, 봄의 들뜸, 여름의 뜨거움, 가을의 고요함. 이런 감정의 주기를 타며, 정서의 리듬에 따라 살아간다. 모든 것을 감지하고, 무의식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런 감지의 능력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에서

한국인은 ‘예민한 민족’이기도 하다. 이 압축되고 다듬어진 민감성은 예술적 감성의 시작점이다.


그 감각은 때때로 피로하다.

비교와 타인의 시선이 그 예민함을 자극할 때도 있다.

비교하고, 서로를 의식하며, 끊임없이 ‘미세하게’ 경쟁한다.
이 경쟁은 피로감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감각의 해상도를 높였다. 잘 보이고 싶고, 뒤처지고 싶지 않고, ‘센스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감각'의 집착으로 이어져 예술적 센스를 예리하게 만들었다.
옷을 고를 때, 말투를 정할 때, SNS에 올릴 한 장의 사진을 선택할 때 모두 드러난다.
무언가가 ‘감정의 결’에 맞지 않을 때, 한국인은 굉장히 곤란히 여기며 예민하게 반응한다. 반응은 곧장 ‘이건 좀 별로야’, ‘뭔가 안 맞아’, ‘조금 거슬려’ 같은 말로 이어지고
그 말은 다시 자신의 감각 조율로 이어진다.
이런 부분은 단지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차원이라기엔,
존재를 정돈하는 방식이 감각적이고 빠르고 너무 세련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흐름에 놓여 있는지를
감각으로 조율하고 표현하는 것.
한국인의 예술성은 이 조율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한국인은 경쟁과 비교도 정서적 연료로 전환한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여도, 속으로는 무언가를 끓이고, 다지고, 다시 구성하는 힘이 있다.

겉으론 조용한데, 속으로는 무언가를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하고 — 은근한 독기란 그런 것이다.


한국인의 예술성은, 존재의 결로 배어 있다.

누군가는 그 감정의 깊이에 휩쓸리고, 또 누군가는 그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꺼내온다.


예술이란 감정을 감각하는 능력이고, 감각한 것을 표현하는 용기다. 그리고 그 용기는, 이 국민성 안에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드러내왔다.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

정이 있으면서도 날이 선 민감함.

그 모든 모순을 품고도,

오늘을 감각적으로 살아내는 국민성.

그래서 한국인은 국민성 자체에 근성과 예술성이 깊이 내재된 민족 같다.

한국인은, 날때부터 모두가 고흐였다.

감각의 정교함과 감정의 밀도, 불안, 표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감각.

운명처럼 예술을 감각하는 민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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