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gives wings… and locks the sky>
부모가 된다는 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나는 아직 미혼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가까운 이들을 만나면 어우,..그냥 지나치기엔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다.
툭 던지듯 올라오는 잔소리 같은 생각들에, 괜히 더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지도 않고 입만 살아 있는 건 아닐까 싶다가도,
또 하나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첨언을 덧붙이고 싶어
차마 꺼내지 못하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도 다시금 꿀꺽 삼켜지는 말이 있다.
부모는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정당화하게 된다.
때로는 ‘좋은 걸 해주겠다’는 순수한 의도가, 자녀의 삶을 소리 없이 갉아먹는 결정이 되기도 한다.
자녀의 세계에 무단으로 들어와, 인테리어를 바꾸고, 조도를 조절하며, 심지어 공기의 농도까지도 ‘배려’라는 이름으로 조정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배려’가 종종 폭력의 얼굴로 자녀에게 가닿을 수가 있다.
아이를 위해 더 좋은 걸 해주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아이의 감각을 대체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부모라는 자리는 사랑이라는 명분아래, 자녀의 세계와 경계를 무심코 넘나들 수 있는 위험을 품고 있기에, 그만큼 그 역할은 깊은 존중과 이해 없이는 헤아릴 수 없는, 매일의 섬세하고도 위대한 도전이 된다.
핏이 딱 맞는 옷을 원하는 아이에게, ‘여유 있는 게 편하다’며 벙벙한 옷을 입히고,
작고 집중이 잘 되는 독서실 책상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성공은 크기에서 온다’며 덩치 큰 서재 책상을 안긴다. 이 취향의 불일치가 사소해 보이지만, 자녀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국경선이고, 자존감이고, 자유의 전부일 수 있다.
그 경계를 침범당할 때, 자녀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기보다 ‘내 존재가 지워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아이의 자율적 미적 감각, 공간에 대한 소우주적 감성,
무엇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해나가는 섬세한 재미들.
그 모든 것이 서서히 사라진다.
선택권을 박탈당한 존재는, 말없이 뒤로 물러날 것이다.
안타까운 건, 그렇게 침해된 선택이 자녀의
감정의 문제에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딱 그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자기 역량을 끌어올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발견하고, 스스로 택한 길 위에서 아이는 훨씬 멀리, 깊이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종종 부모의 무심한 판단과, 사랑을 가장한 ‘이게 더 나아’라는 일방적 선택 속에 흙먼지처럼 덮이고 만다.
그 선택의 무게를 가볍게 여긴 대가는, 아이의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는 일일 수 있다.
어른들은 종종 말한다. “내가 자녀를 키우며 얼마나 헌신했는데…”
하지만 그 ‘헌신’은, 상대의 동의 없이 실행된 것일 수 있다.
그 말은 자녀를 말없이 무너뜨릴 수 있다.
그 ‘헌신’의 주인공은 '나'였고, 자녀의 의견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신의 방향을 잘 조준하지 않으면, 그것은 지배의 언어로 변질된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의견을 조심스레 '묻는 것’이다.
“네가 진짜 원하는 건 뭐야? 이걸 해줄까? 저걸 사줄까, 아니면 그냥 선택할 수 있는 돈을 줄까? 네가 정해. 나는 기다릴게.”
그리고 그것이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한, 믿고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
자녀가 그 길에서 미끄러진다해도, 그 실수는 자신의 발로 걸어내며 온몸으로 얻은 것이기에 의미가 있다.
마음과 몸에 새겨지는 적나라한 배움은, 때로는 넘어지고 흙을 묻혀가며 터득되는 법이다.
날아오르기 전, 땅에 부딪히고 흙탕물에 뒹굴며 배운 경험이 날개를 펼치는 힘을 길러주는 것 같다.
스스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날게 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 날개를 보호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날개를 꺾기 전에, 그 날개가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를 먼저 ‘들어보는 것’. 그게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스로의 날개를 펼치고 훨훨 날도록 허락하는 일,
그게 사랑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