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의 방언
나는 로미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 언어는 나에게 뜨겁고, 달고, 빠르고, 무엇보다...나와는 너무 다르다.
내 안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는 오래전에 조용히 퇴장했다.
세상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의 표준으로 불러 세우지만,
나는 그 언어를 끝내 흉내내지도 말해본 적도 없다.
그들의 사랑이 하나의 극이자 드라마라면, 나는 다큐멘터리같은 조용하고 담백한 삶을 소소히 속닥하게 살고있다.
사랑은 여전히 아름다운 단어지만, 나에겐 발음이 어색하고, 억양이 다르고, 문법이 자꾸 틀린다.
나는 어쩌면 로미오의 말을 말하지 못하고,
그저 그 말의 방언처럼 삐뚤빼뚤한 감정을 쌓아두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로미오의 말은 달콤하다. 입술사이로 설탕이 녹듯 달고, 시럽처럼 감긴다.
나는 그 말투 못 쓴다. 그러나 로미오의 방언은 혀 밑에 숨긴 쓴 약처럼 삼키는 소리다.
로미오는 ‘Heart’ 라는 말 한마디로 사랑을 시작하더니, '마음', '애정','심장'이 되었지만—
나는 그걸 말하려다.. 폐, 좌심방, 우심방, 가슴 통증, 들숨 날숨, 과호흡 증후군까지 나왔다. 사랑 얘기하려다… 해부학이 나왔다. 로미오의 방언은 사랑의 불협화음이다.
나는 아직 사랑을 잘 모른다.
누군가를 뜨겁게, 숨가쁘게, 정신없이 좋아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사랑의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서로가 연락을 기다린다며 자꾸 폰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뜬금없이 설렘에 휘청이는 그런 감정들.
나에겐 그 모든 게 어감은 예쁘지만,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뜻은 모르지만 박자는 나름 좋고, 그냥 조용히 듣고 감탄하는 상태.
주변에서 사랑얘기를 할 때, 내가 쓰지 않는 언어의 시를 듣는 느낌이다.
그런 것들은 늘 나에게 낯선 언어였고, 어딘가 불투명한 환상의 문법 같았다.
K-pop의 사랑 타령이 낯간지러웠던 이유도, 그 감정이 내 삶에 실제로 와닿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 적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솔직하게 "아니요"라고 말할 것이다.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깊이 빠져 사랑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연애를 해봤어도, 미치도록 좋아하는 그 감정을 모른다.
나는 감정을 남 앞에서 흘리는 걸 피해왔다. 사랑의 감정, 그 변두리에 늘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조차도 내가 좋아하는지 마음이 있나 싶을 정도로 늘 예의를 갖추고 차분하게 있는 듯 없는 듯 대했다. 나의 감정은 늘 수건처럼 개어져 있었고, 특히 이성 앞에 잘 펴본 적이 없다.
상대가 불타고 있다면, 나는 슬며시 온도계를 꺼내드는 편이었다.
나는 그 불이 내 벽지에 옮겨붙지 않길 바랐던거같다. 뜨거운 감정에 휘둘리는 걸 늘 조심스러워했다.
이성적이고, 침착하게, 너무 정숙하게 좋아하면 아무도 그걸 모른다. 나 빼고.
로미오는 사랑을 소리로 외쳤고, 나는 사랑을 불씨처럼 감추었다. 드러내진 않지만, 꺼지지도 않았다.
사랑에 대한 표현들이 대부분 나에게 비문처럼 느껴졌다.
사랑은 좋은 거라지만, 나는 그 앞에서 늘 경계했고, 발소리 하나에도 놀라며 멈췄다.
나는 사랑의 감정을 잘 모르겠다. 남녀간 사랑이란 감정은 나에겐 늘 타인의 언어다. 멀리서 듣는다.
예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번도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와본 적 없는 것들.
그런 마음은 발현되기 전에 늘 머릿속으로 검토하고, 검열하고, 내 행동이나 언어로 어떤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으려 한다. 감정을 흘리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이따금 생각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어쩌면 나에게 부적합할지도 모르겠다고.
남녀가 적당한 시기에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70년쯤 살아가며 인생을 완성해간다는 구조—
그건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루고자 하는, 건강한 인생의 루트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딘가 한 부분이 함몰되었거나, 조금은 특이한 구석이 있다고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요즘 나는, 슬쩍 후자의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 그 '정상적 도착점'이라는 곳은
그림도, 각도도, 맥락도 전혀 잡히지 않는다.
그냥…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빈칸.
그래서 가끔 결혼을 떠올리면 아찔하고, 약간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공포증 비슷한 게 따라온다.
그리고 늘 결혼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건 '수면의 질 저하'이다.
사랑이 함께 잠드는 거라면,.. 난 푹자고 싶은데 수면 방해요소가 있을거 같다라는...
사랑이란 감정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 있지만, 그 끝에 남겨지는
정적과 잿더미의 여운은 삶의 지속성보다 오히려 위험의 조짐이 더 많게 다가온다.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는 반드시 '각자의 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집이 새장처럼 작든 상관없이, 개인의 공간이 1평이든, 화장실만한 공간이든.
그저 ‘나만의 공간’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서로가 각자의 방에서 인간으로 재정비된 후, 다시금 ‘사람다운 얼굴’로 배우자를 마주할 수 있을 때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의 방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내가 나를 마주하고, 점검하고, 수리한다.
하루의 나를 시작하고 정돈하는 곳, 그곳에서 사람으로 채비를 차린 후 가족관계를 이어간다.
이런 조용한 '개인의 리추얼'이 있어야, 비로소 나는 상대를 늘 환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누군가를 마주하는 걸 견디기 어렵다.
내 마음을 온전히 건네기 위해선 먼저 나를 정돈할 시간이 필요하다.
공간이 중요한 게 아니지만, 인간으로 다시 정돈되는 곳은 꼭 필요하다.
감정을 수습하고, 혼자서도 나를 어루만지고, 자신을 복원하는 자리.
감정을 씻고 내면을 다듬는 비밀 아지트이자, 조용한 쉼표같은 공간이다.
그래야 비로소 정돈된 나의 매너와, 무너지지 않은 상태로 좋은 것들로 배우자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느날, 나도 상대의 방 앞에서 똑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며 “나 지금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면
"응, 알겠어. 일봐^_^"
물론 속으론 잠깐 농담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혹시, 게임하고 있는 거 아냐?”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건, 서로의 감정 관리와 회복이 철저히 각자의 공간 안에서 잘 정리되고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사랑을 더 가볍게 하지 않고 진심을 외면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다.
부부라 해도, 서로의 공간과 감정의 자율성을 무시하고 침범하는 건
애정이 아니라, 자기 파괴에 가까운 일이다.
부부는 각자의 ‘존재 방식’을 인정받을 때, 비로소 한 지붕 아래에서 진짜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성격도 다르고, 말투도 다르고,
상처를 감추는 방식이나 감정을 푸는 속도도 서로 다르다.
부부는 함께 살아가되, 각자의 감정을 수습할 수 있는 공간과 여백이 필요하다.
그 여백이 있어야 함께 있는 둘 사이가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가다가도
어떤 날은 감정이 혼자선 도저히 감당되지 않을 때가 온다.
마음이 무너지고, 말 한마디 꺼내기도 어려운 날.
그런 날엔,
방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서로에게 조용히 다가가 품에 안긴다.—이게 진짜 부부의 사랑 아닐까.
그 순간 꺼내야 할 말은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비록 그 말이
“당신이 돈을 너무 펑펑 써서 내가 숨이 막혀요.”
“당신이 자꾸 화장실을 더럽게 써서 분해요.” 처럼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극히 자잘한 불만이라 해도
그 말이 자기 방 안에서 한 번쯤 정돈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다듬어졌다면,
그후로 건넬 수 있는 말은 이런 것일지 모른다.
“미안해.”
“괜찮아.”
“고마워.”
“지금은 내가 네 방이 되어줄게.”
이런 짧은 한마디가 때론 긴 싸움보다,
수많은 설명보다 더 큰 위로가 될 것 같다.
서로가 닫고 있던 마음의 문도,
그 순간엔 천천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열린다.
이렇게 '개인 공간'이라는 건, 사랑을 피하는 거리가 아니라,
사랑을 다듬기 위한 공간이 된다. 방에서 혼자 운동을 하든, 메이크업을 하든 그건 단절이 아니라 부부사이의 여백이다.
부부는 늘 모든 걸 함께할 수는 없지만,
서로에게 늘 '쉼터'가 되어줄 수는 있어야 한다.
진짜 사랑은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그 거리를 오갈 수 있는 용기와 여백을 서로에게 허락하는 일같다.
오히려 부부이기에 서로의 '공간'과 '감정의 자율성'을 지켜주는 건 필수라고 생각한다.
함께 살되, 억지로 같은 프레임에 들어가려 하지 않기.
사랑은 맞춰지는 게 아니라, 각자의 모양대로 존재하면서도 서로를 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이다.
부부라도, 아니 오히려 부부이기에 더더욱— 서로의 ‘영역’을 지켜주는 건 존중이자, 가정의 생존이다.
상대를 내 프레임 안에 욱여넣고 ‘맞춰서’ 살라는 건 서로를 서서히 부수는 방식이다.
함께 거실에서 웃고, 한 침대에서 잠들 수 있는 건
각자의 존재가 제대로 숨 쉬고, 제 모습대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구조 안에서만 가능하다.
좋은 관계란, 한 사람이 눌리고 접히는 구조가 아니라
각자의 자전축(自轉軸)을 유지한 채, 서로를 중심으로 도는 공전(公轉) 같은 것이다.
이 공전은 가만히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계속 서로의 성향을 탐색하면서 합의점을 찾고,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언제든 틀어진다.
나는 상대 앞에서 말끔하고, 예의있게 언제나 ‘정돈된 상태’로 있고 싶다.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이기보다는, 내가 어떤 감정에 휩쓸릴지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먼저 다잡는 사람이고 싶다.
사랑이란 건, 서로가 '사람'이란 걸 잊지 않는 일이다.
인간은 불완전함의 가장 분명한 형상이다.
감정의 속도도, 삶의 박자도 다르기에 개인의 영역에서
서로를 해치지 않게 잘 조화를 이루고, 존중해 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람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려주고,
지켜주는 마음은 찐 사랑이다.
다행히도 부모님은 결혼하라는 압박이나 성화를 주시기 않는 편이시다.
그저 말 한 마디.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혼자 살아도 괜찮다. 난 너를 걱정 안 한다.”
이 말은 나에게 커다란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그 자유 안에서 나는 결혼을 ‘의무’가 아닌 ‘선택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회의 시선보다 부모의 무언의 지지가 훨씬 더 나를 인간답게 이어준 것 같다.
나는 삶이 구겨지지 않고, 접히지 않고, 최대한 나다운 상태로 오래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굳이 휘어지지 않고, 무리해서 누군가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누군가는 나이들어 아프거나 고독사하는 걸 두려워한다.
“혼자 늙으면 어떡해? 외롭지 않아?”
“아프면 누가 간호해줘?”
“그래도 사랑은 해봐야지! 죽을 때 외롭지 않아?”
나는 그 모든 질문에
“간병을 목적으로 사랑을 계약하는 건.. 좀 아니잖아?”
"왜요?" 라고 되물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낯설지 않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몇차례 그 문턱을 몇번 넘나들어 본적이 있어,
가끔은 아직 세상에 우연하게 남겨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이 혼자 사는 삶을 '외로울것'이라고 확신에 차 이미 단정하고 말하는 생각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길고양이처럼 조용히 아프다, 조용히 사라지는 것도 하나의 삶. 의미있는 퇴장이라고 여긴다.
길가의 주인없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앓고, 조용히 퇴장하는 삶— 그것이 슬프거나 차가운 회피가 아니라, 그에 맞는 삶인 것이다.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 편이다.
누군가 불 꺼주기 전에 내가 먼저 자리 정리하는 것. 그게 더 있어 보일 때도 많다.
일하면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틈에서 조용히 사라진 사람들을 여럿 목격했다. 그들의 이음새없는 퇴장은 슬픔도 있었지만, 한 생의 정갈한 마무리였다. 나는 그런 죽음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낭만이 아니다. 다수의 기준에 닿지 않아도, 그저 삶의 끝마저도 하나의 형태일뿐 그다지 문제가 될 게 없다.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 같다.
나는 사랑을 잘 모른다.
하지만, 굳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에 살아남기위한 배우자 찾기'를 해야 한다면,
그 행동의 출발점부터가 납득되지 않는다.
사랑이란, 현실이라는 케이크 위에 얹은 설탕 장식일 수도 있다.
사랑은 좋은거지만,
나는 그 케이크가 이미 느끼하다. 달지않다.
인생을 그렇게까지 달콤하게만 느끼고 싶다면,
나는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정신건강의학과... 예약 도와드릴까요?”
나는 아직 사랑을 잘 모른다.
지금의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 조금 비켜 서서,
말보다 숨이 먼저 나오는 자리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사랑이든 아니든, 혼자든 함께든,
그 모든 선택지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안에서 내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지금은 그 물음 앞에서 크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걸어가고 있다.
세상은 여전히 로미오의 언어로 사랑을 말한다.
숨이 가쁘고, 눈빛이 흔들리고, 마음이 앞서고, 사랑에 가슴이 탄다.
나는 그걸 보면 가끔,
"좀 진정하자, 여기 실내다..." 같은 생각부터 든다.
나는 로미오가 쓰는 사랑의 문장들 안에서 항상 한 발 물러서 있고,
조금은 등을 돌린 채 어긋나 있다.
감정은 어딘가 엇나가고, 나는 선뜻 그것들을 붙들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로미오의 말이 아니라, 로미오의 방언을 쓰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억양은 낯설고, 문장들은 건조하며, 감정은 다르게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를 오래 생각하고,
곱씹었고, 꽤 조심스럽게 꺼냈다.
나는 사랑을 잘 모른다.
누군가를 뜨겁게, 정신없이, 영화처럼 그렇게 몰아치듯 좋아하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세상은 여전히 로미오의 말투로 사랑을 말지만
나는 여전히 어깨를 계속 틀고 있을 것 같다.
사랑이 내게 다가오면,
나는 먼저 그 감정의 온도를 재고
식혀야 한다면 찬물을 붓고, 데워야 한다면 조용히 불을 올린다.
내 사랑은 그렇게,
조금 늦고, 조금 삐딱하지만 그렇다고 없지는 않은
알아채면 좋은 거고, 못 알아봐도 괜찮은
티 내지 않아도, 마음은 그곳에 있는—로미오와 줄리엣의 방언이다.
격정적이지 않고, 말이 많지 않다.
고백보다 행동이 먼저이고,
눈빛보다 온도가 중요하다.
누구나 아는 방식으로 사랑을
말하진 않더라도, 로미오의 언어이다.
로미오의 표준어로 외치기보다는 로미오의 말투를 조용히 옮긴 풀어낸 말.
그건 사랑의 ‘표준어’가 아닐지 몰라도, 충분한 사랑이다.
사랑의 언어는 때로는 방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