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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눈, 그 우주의 CCTV

Eye of the Sky..

by La Verna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끝내 ‘운’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변수가 있다.

누구도 예외 없이, 계산되지 않은 방향에서 삶은 흐르고,

그 흐름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 개입되어 있다.

그것은 때로 과학을 뛰어넘고, 논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직관과 감성,

이성과 신비가 절묘하게 겸비된 영역에서만 감지되거나 일부분이 포착되는 종류의 것이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과대평가없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람.

인간 생애의 전장을 관통해 조망하는 이라면 그 기류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다.

생의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를 가진 이, 인생의 전체 구조를 꿰뚫어보는 사람은,

운을 느낀다. 그건 우연이 아니라 감각이다.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것은 나의 인식 너머의, 말 그대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래서인지, 특별한 종교적 신념없이 살아온 나는 가장 확실한 실체 —경험으로 축적된 '자신'을 믿으며,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삶이 흔들릴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유일한 자산으로 삼게 되었다.

근거없는 자신감일 수도 있지만,

'자기 신뢰'라는 것 자체를 자본이라고 여기고,

이를 기반으로 삶을 조용히 튀지않게 운용해나가는 편인 듯싶다.

하지만 ‘운’은 실재한다고 믿는다.

어떤 손에 잡히지 않는, 예측할 수도 없는

시장에 반영되는 외생 변수처럼,

어느 날엔 기회가 되고, 어느 날엔 전복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통제 밖에서 흐르는 무형의 힘이다.

삶의 모든 방향을 단숨에 틀어버릴 수 있는 힘.

나는 그 순간의 개입을 ‘하늘’이라 부르고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존재하는 말없는 관찰자가 있다.

어떤 신격화된 존재라기보다는, 흐름에 가까운 무엇이다. 삶을 살아가는 개인의 머리 위에서 유유히 흐르며, 이 세계를 조용히 관조하는,

어떤 집합적이고도 총제적인,

초월적인 메커니즘에 가깝다.

이는 신념보다는 감각에 가까운 것이다. 말로는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흐름.


때로 삶의 경계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운명을 바꾼 것은 아주 작은 변수들 —이를테면 의사의 컨디션, 그날의 날씨, 환자의 회복력같은 요소들이 정교하게 퍼즐처럼 딱 맞물려 만들어낸 기적이다. 또 어떤 순간에는, 내가 품었던 좋은 의도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되돌아올 때이다.

혹은 권선징악(勸善懲惡) — 곧 바른 행동은 격려받고 악행은 응징하는 고전적 윤리 원칙이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을 목격할 때, 나는 잠시 하늘의 존재를 체감해 놀라곤 한다.

인간관계 안에서도,

누군가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다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소진하게 되거나,

부부 사이에서 신뢰가 배신과 기만으로 가볍게 짓밟히는 경우가 있다.

그 고통이 치명적인 만큼, 삶은 언젠가 조용히 그 균형을 맞추며,

잘못한 자는 오래 숨어 있거나 감추지 못하고

결국엔 그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어딘가에서 제 발목을 잡히게 된다.

이 세상은 말은 없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날카롭게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모든 의도와 선택, 잔상까지도 시선을 비껴가지 않는다.


젊었을때, 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20대 때, 한동안 함께 일했던 동료가 있었다. 내가 그보다 늦게 입사했지만 더 빠르게 주목을 받았고,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그건 그에게 내내 불편함 감정으로 남았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내 업무에 살짝 칼같은걸 숨기고서 툭툭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지금보면 귀엽지만. 그냥 은근히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던 그런 느낌이었다.

자신의 일은 무리하게 슬쩍 떠넘기거나, 너는 인정도 받았으니 '이건 너가 해야지?'하는 느낌으로 자신에게 편한 방향을, 아무리 지저분한 방식이라도 취하며 나를 엮어 넣었다.

자신의 일은 정말 대충했고, 조직에 주인의식이 전혀 없어보였다.

책임은 피하고, 공은 가져갔다. 문제가 생기면 내 이름을 불렀고, 성과가 생기면 내 이름은 조용히 지워졌다.어떻게든 나를 뒤로 밀어두고, 문제가 생겨 틀어지면 갑자기 나를 앞세운다. 어우, 왜이러세여.

그 때, 나의 이름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들이 많았다. 내가 공들여 마무리한 일에는 그의 이름이 얹어졌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내 이름은 ... 음? 어디 갔지? 그렇게, 무심하게 내가 지워졌다. 그는 그렇게 내 이름을 조용히 지우고, 탈이 나면 내이름을 불렀다.

내가 문제 앞에 나서서 해결할 때마다,

그저 웃으며 뒤에서 커피를 마셨다. 나의 폐인됨이 그의 취미였나보다. 불리할 때 날 앞세우고, 뒤에 숨어서 "왜 그랬어요?" 하며, 자신의 일을 내가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게 일상이 되었고, 묵묵히 참았다.

참고 버티는 것이 미덕인 줄 알았던 어리숙한 젋은 시절이다. 아무 말하지 않았다.

점점 더 고달픔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대상포진까지 왔지만, 그때는 그냥 묵묵히 일했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뭐~' 하며.

누구에게 말하면 하수같았다. 괜히 내 마음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

“사는 게 원래 그런 거야” 그 말이 돌아올 걸, 아는데 굳이.

"그냥 살아내야지 뭐~"

아무 기대없이 쓴고백을 삼키며 빈사무실에서 야근을 하는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관련된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위의 사람들은 많은 걸 알고있었다.

대표님도, 다른 이사님들도, 어떻게 알았는지 다 알고 계셨던 것 같다.

홀로 쓴인생을 삼키고 있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국제협력 프로젝트와 관련된 중요한 해외출장.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였고, 이를 현지에 정착시키고 안정시키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내가 지명되었다. 그 자리는 원래 그 동료의 몫이었다. 느닷없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우연히 소뒷걸음질치다 리스펙하는 뛰어난 팀원들과 함께 귀중한 경험을 쌓으며 많은 것을 배워 돌아올 수 있었다.

출장을 마치고, 실무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스킬을 답습하며 그 경험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회사를 떠났다.

대표가 어느 날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다 알고 있었어요.”

그말을 듣고, 괜시리 울컥해서 그 앞에서 눈물을 튀어나와버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침묵의 시간을 위로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하나의 믿음이 생겼다.

악의없이 조용히 견디며 쌓아온 진심은, 언젠가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

삶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없이 무심할정도로 조용하게, 그리고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말없이 지켜보는 어떤 눈이 분명 있다.

나는 그것을 소리없이, 그러나 모든것을 관조하며 다 읽고 있는 존재로

'하늘'이라는 부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믿게되었다. 이 하늘을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주체는 ‘인간’이라고.

현실에 치이며 무심히 살아가는 날들 속에서도,

인간이 쌓아가는 작은 미덕들—관대함, 포용, 절제, 품위있는 선택들은

일종의 긍정적 캐시플로우처럼

하늘에 하나씩 예치된다.

이러한 일상의 덕행들은 적립식 펀드처럼 차곡차곡 쌓여가고, 어느 순간 복리처럼 불어나

‘운’이라는 유동성으로 소리없이 되돌아온다.

무형의 자산이 이자처럼 불어나듯.

다만, 이 운은 지속적인 덕행의 입금이 있을 때만 발휘된다.

하늘은 가장 정밀한 타이밍에, 그 축적된 '좋은 의도'들을 조용히 쏟아붓는다.

반복되는 관대한 행동,

꾸준한 내면의 정제.

그것이 이 메커니즘을 움직이는

유일한 조건이다.


사소해 보이는 행동들도 포함된다.

욕심을 내려놓는 일, 스스로에게 충분하다고 말할 줄 아는 것, 타인을 탓하지 않는 선택, 때론 눈에 밟히는 타인의 흠결을 조용히 덮어두는 일,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려 애쓰는, 조용한 단념.

스스로의 기준을 지키기 위한

모든 조용한 내적 싸움과 선택들이

하늘에 예치된다.


어떤 이는 이걸 두고,

그저 '정신승리하냐'고 비웃을지 모른다.

그럼 그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은

그에게 무엇을 예치하고 있을까.

그가 쌓은 것없이 기대할 수 있는 ‘운’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렇게 돌아보면, 나 역시 그 하늘의 관조아래

운을 받으며 살아온 것 같다.

좋은 사수들, 네 살의 어느 겨울 병상 위에서 살아 돌아온 기적같은 시간도 있었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데에는,

고마운 것 들의 절묘한 개입

그 하늘의 관조와 시선이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의 삶 전체는 '도덕적 자산운용'이라는 개념이 작동한다고 여긴다.

매일을 살아가며, 충실히 관대함을 축적하고,

그것이 누적되어 ‘운’이라는 보이지 않는 이윤으로 회수되기를 기대하는 것.

일상의 작은 선택들 속에- 매일의 품위, 작지만 '좋은 의도'들로 구체화된 순간들이 하늘에 쌓인다.

장기적으로 언젠가 운의 형태로 되돌아오는 삶의 구조—그것이 상냥한 말투나 불필요한 비난을 참는 구력, 작은 친절을 주저하지 않는 행동이든..

인간은 하늘의 관조라는 초월적 메커니즘과 소리 없이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이 작동안에서, 위에서 건네는 운에 힘입어 삶의 기회와 낙을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흐름에 휘말려 좌절을 겪거나, 삶의 전복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안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이 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좌절도 있다.


인생은, 하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보이지 않는 협력, 성문화되지 않은 암묵적 계약이 있고,

안에서 수많은 정서적 스펙트럼을 일으키며 도달하는 하나의 귀결이자 결과물인 셈이다.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품위 있는 투자 방식,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

큰 기대 없이, 꾸준히 예치하는 방식.

욕망을 벗어난, 인간적인 투자가 곧, 도덕적 자산운용이다.


나는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을 믿는다.

검은 먹 가까이 있으면, 나 또한 검게 물들 수 있다.

현실이라는 실존 속에서는, 때때로 어쩔 수 없이 '검은 먹'같은 어둠이 서린 공기, 음침함을 머금은 환경 속에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생계를 위한 일이라면, 더더욱 외면할 여지도, 회피하기도 어렵다.

좋지 않은 언행을 습관처럼 내뱉는 사람들, 부정적 에너지를 품고 있는 얼굴, 무너진 윤리, 거친 말투, 일그러진 표정 속에 오래도록 머물거나 함께 공존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 말의 그늘을 쉽게 떨쳐낼 수 없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실체를 갖고 다가온다.

그럼 천천히 흡수되는 어둠이 나를 서서히 잠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온다.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에 짙게 물들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다시금 정신을 붙잡고 '나'의 중심으로 돌아오려한다.

검은 먹이 퍼지는 곳에서도 스스로를 다시 정화하고, 맑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내적인 정화 시스템이 필요하다. 검은 얼룩을 지워내고, 다시 나답게 유지할 수 있는 안전장치.

나에게 그것은 ‘걷기’와 ‘글을 쓰는 일’이었다.

걷는다는 것, 내면의 탁류를 천천히 가라앉히는 일같다.

러닝처럼 속도를 내기보다는, 한 걸음씩 밟으며 세상을 받아들이고 나에게 집중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어지럽고 뒤엉킨 감정을 해부하고 불안을 천천히 해체해나가는 작업이다.

언어로 꺼내진 생각들은 비로소 구조화되고, 그 구조 안에서 다시, 나를 적나라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나역시 검은 먹빛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잃고 말았을 것 같다. 사실 검은 물은 이미 많이 들었다. 지운다며 살아가지만, 어느 얼룩은 그냥 나의 일부가 되었다.

덜 보이는 쪽으로, 매일 슬쩍 감춰두며. 아닌척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걷어내보려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더 걷고, 더 자주 쓴다.

다시금 머리를 정돈하기 위해.

그렇게 매일 다시 나로 돌아오는 중이다.



하늘의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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