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다행인 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몰두할 수 있음’은 참 드물고도, 귀한 다행이다.
여기서 말하는 몰두란, 아침 8시에 출근 도장을 찍고 영혼이 닳아가는 생존 루틴, 생계형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이고, 내가 말하는 것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생기'다.
스스로 빨려들 듯 빠져드는 어떤 흥미로운 것들.
예술, 운동일 수도 있다. 때로는 눈앞에 놓인 한 점의 음식이거나,
밤을 새우게 만든 게임 한 판일 수도 있다.
그렇게 ‘나’를 잠시 잊는 시간은, 오히려 나를 더 분명히 각인시키고, 기억하게 해주는 시간이다.
그것은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신을 해치는 위안이 아닌,
무언가가 나를 낚아채듯 끌어당기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는 상태.
몰입. 무아지경.
나이들수록 잠시나마
그런 쉼터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현실을 피해 어딘가 과몰입한 나 자신을,
아주 잠깐이라도 기꺼이 허락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것.
그것은 진정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몰두할 수 없다.
제한된 에너지는 새고, 마음은 빠르게 균열된다.
어딘가 열린 수도꼭지처럼 '나'라는 존재의 에너지가 새고, 마음엔 누수가 생겨 줄줄 흘러나간다.
무엇 하나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어떤 날은 이유없이 지치고, 어딘가 불편하며,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피어오를 때도 있다.
그럴 땐 문득,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그럴 때 흔히 ‘낙원’을 찾는 것 같다.
“도망친 곳엔 낙원이 없다”는 말도, 아마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본질을 놓치고 있는 말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낙원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왜냐면 낙원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장소나 환경이 아니라,
내가 들고 다니는, 내 안에 있는 어떤 가능성에 가깝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우리는 그것을 들고 다닌다.
그리고 그 상자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도시로 떠나고,
멋진 집으로 이사해도,
내가 그 상자를 열지 않으면,
그곳엔 낙원이 없다.
낙원은 이동의 결과가 아니라, 내가 내 안을 여는 순간 생겨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도망의 반대는 정착이 아니라
깨어남이다. 열리고 펼치는 개념이다.
깨어남.
늘 멋지게 찾아오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엉망이고, 지치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의 직전까지 버티다가, 거의 끝에서야 찾아온다.
진심으로 "더는 못 하겠다"—넉다운 선언이 떨어지는 그 시점,
비로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열쇠가 손에 쥐어진다.
긴 호흡으로,
‘어딘가’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무언가’에서 멈춰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자신에게서 낙원을 꺼내는 일이다.
불안은 실체가 없다.
외면하면 더 짙어질 뿐이다.
하지만 멈춰서 바라볼 수 있다면—분명히 거기에 있다.
불안은, 응시의 깊이만큼 형태를 가진다.
형태를 얻은 불안은 비로소 다뤄지고, 이해되며,
그 이해 속에서, 서서히 소멸한다.
인간은
자기 혼돈을 해독할 능력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독하고 감당하기에
사람은 너무 감정의 수면아래서
허우적거린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상태로,
감정의 밑바닥에서 맴돈다.
스스로에대한 신뢰를 조금이라도 잃었을 때,
사람은 쉽게 혼란에 빠지고, 외로워한다.
하지만
그 실체없는 감정들을 직면해 마주할 때,
우리는 깨어난다. 열린다.
두려움은 상상에 불과했고,
불안이 더이상 마음의 그늘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지금’이라는 시간이
선물이라는 걸 알게된다.
지금 여기 있는 내 삶이 사실은
생각보다 근사한것어었음을 보는 안목이 생긴다.
모든 걸 통과하고 나면, 깨닫게 된다.
지금 이 하루가,
내 인생에서 가장 괜찮았고
행복한 하루였다고.
몰두의 끝엔 언제나 감사가 있고, 다행이 있다.
그리고 세상엔,
그 다행을 알아보는 사람과
그 다행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줄도 모르는 사람ㅡ
두 부류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