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어운동 후기
요즘 거의 매일 지옥문을 열고 코어 운동을 하고있다.
이 복근 운동은 매번 나에게 인생에 대해 "JOT 됐다" 고 외치는 걸 멈추고, 세상 풍파를 막아낼 방어력처럼 王자를 줄테니 '견디라'고 하는 것 같다.
"걍해! 나 요즘 코어 운동 중이야." 이 방어력을 위해 나의 시달린 복근은 '나 JONNA 단단해지고있어'하고 강한 멘탈로 이 고통 속을 견디게 한다.
가끔 근력 운동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지독한 고통을 견디는데,
세상에 내가 못 견딜 게 뭐가 있겠어?"
이 질문은 때로 내 안의 무한한 잠재력을 끌어내는 듯한 황홀한 환각을 일으키다가도,
시작한 지 5분 후면
"어우, 그냥 이건 못 하겠네…" 하며 타협하려 든다.
복근 운동이란 내게 참 신비로운 행위다.
인간이 아무런 무기 없이, 지극히 자발적으로, 정중하게, 자기 뱃살을 미친 듯이 패는 행위.
자기 주도적인 우아한 자해이자, 인체를 고문하여 아름다움과 사회적 인내심을 생산하는, 품격있는 자기 학대가 아니고 무엇일까!
30개 동작을 총 20회씩 3세트씩이라는 내장 폭격 속에서 도달하게 되는 사회적 인내심이 놀라울 따름이다.
겉으론 깔끔하고 체계적인 루틴 같지만, 현실은 한 치의 논리도 없는 무차별적인 내장 폭격이다.
2세트 중간쯤 하다 보면 혼은 나가고,
정신이 없는 상태로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이… 이렇게 흠 많고 아름다웠나…?
평생 본 적 없는 천장 텍스처의 미학 속에서 동물의 얼굴 형상을 발견하고 사회학적 사유에 빠진다.
그리고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나는 폰을 집어 들고 검색을 한다.
["운동 안 하고 복근 만드는 법."] 물론 요행의 길은 역시 없었다. 이 길은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정직한 인내와 폭력적인 현실을 견디는 길이었다.
나는 이내 희망을 접고, 바른 자세로 누워 플러터킥을 하는데 배에서 쓰나미가 밀려올 때,
근육이 찢어지는 인체의 절규와 함께, 명치에 '王'이 새겨질 거란 웅장한 환각에 사로잡혀 아프고 감동하고, 조금 울다가, 널브러졌다.
세상에 그 어떤 범죄도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런데 복근은 고작 60회로도 마치 참회 수준의 죄 값을 요구하는 것 같다.
복근 운동하다 복부에 王자를 새기는 것은 아주 오래된, 지극히 상식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나만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고 나면,
이전까지 나와 함께 해온 나의 장기들이 놀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똑바로 서는 느낌이다.
어제의 나태함과 사회적 스트레스에 군기를 잃었던 인체의 장기들이 "차렷!" 자세로 경례를 한다.
시력은 맑아지고, 균형 감각을 되찾는다.
심지어 피부까지 눈치껏 좋아지니, 코어 운동은 안일해진 장기들에 스스로 채찍을 드는 일이다.
"초심을 잃지 말라,
세상이 만만치 않으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몸에게 단호하게 명령하는 시간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나의 흐물텅한 장기와 근섬유들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20대로 돌아가서 세상과 싸워라"는 무언의 압박 같은..
물론 절대 그건 불가능하다. 이젠 20대처럼 무모하게 살아갈 수 없어졌다. 지혜롭게 버티고 유연하게 양보하는 훈련이 필요해졌다.
20대에는 많이 달랐다.
한 시간 코어 운동을 하고도 바로 뛰쳐나갔고, 넘어지면 반사적으로 균형 잡고 튀어 오르곤 했다. 그 정도 민첩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딱 그 지점,
운동 '다 했다'라는 뇌의 꾀병 포인트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1분만 운동했는데 머리에서는
"야, 그 정도면 됐어. 많이 했잖아.
선수할 거 아니잖아? 그만해. 다 했어."
회복은 느리고, '노력'이란 30대 이후부터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는 가뿐한 '노력'이 아니라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을 해야 간신히 근육이 조금 생기거나 다시 회복이 된다.
그래서 더 버텨야 한다는 걸 안다.
"날 죽이던가, 근육이 생기던가."
둘 중 하나는 일어나겠지 뭐.
중간에 정신이 너무 나갈 땐 쉐이크를 마시는데,
맛보다는 좌절 중에 희망과 의지를 흡입한다는 생각으로 그냥 섭취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지옥문을 열었다.
코어 운동은 득도(得道)와 비슷한 것 같다.
근육보다 단단해지는 건 사실 멘탈이다.
세상에 질질 끌려가지 않기 위해,
사회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빌런들을 품어주는 힘은 사실 나의 복근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고뇌와 인내와 풍파가 스쳐 간 코어인가. 황당하게도, '王'자가 어렴풋이 새겨지면 그 느낌이란... 목욕탕에서 살짝 스쳤는데, 새치기하던 아줌마가
"어..?저사람 운동 좀 하는 사람이다.." 하고 다시 쳐다보고는, 새치기하지 않는 그 무심한 존경감.
이 무언의 고상한 권위란! 근육 자랑보다 내가 세상을 이만큼 견디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리고 내가 상식적인 배려와 양보를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있다는, 내면의 증거인 셈이다. 그래서 이 황당하고 위대한 고통, 앞으로도 계속 즐겨야 한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근육의 아우성을 들어야 내가 떳떳하게 설 수 있다. 그래서 불타는 지옥은 매일 오고, 그 와중에도 복근은 자란다.
운동이 끝나면 머리조차 고통받아 복근의 참혹한 현실을 담은 채, 곱게 묶었던 고무줄은 사라지고,
머리가 부시시하게 엉키고 설킨다. 그것은 곧 "나는 오늘도 진심으로 으르렁대며 수월한 사회생활을 위한 지구력 훈련을 마쳤다"는 뜻이다. 코어를 끝낸 자가 머리 스타일이 멀쩡하다면 그날은 발레를 한 게 아닌가. 진짜 복근과 맞짱 뜨고 온 이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근육의 비명이 박혀있는 것 같다.
"저는 오늘도 지옥에 다녀왔습니다! 살아남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