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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by La Verna

어릴 적, 모든 인간은 각자 ‘신성’을 품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여기서 말하는 ‘신성’은 종교적 위엄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경이로운 어떤 빛이다. 나는 사람 안에 작은 우주가 살아 숨 쉰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새벽, 둥근달을 바라보며 “나는 우주와 연결돼 있다”고 믿으며 요거트를 퍼먹던 그 순간조차, 나에게는 충분한 증거였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이름의 조련사는 교묘하게 우리 안의 신성을 익숙한 틀에 가두려 든다.

“이렇게 하면 안 돼.”

“위험해. 수치를 당할거야.”

“이 길이 더 안정적이야. 거긴 실패로 가는 길이야. ”

사회라는 거대한 암묵적인 손이 우리 안의 빛을 서서히, 혹은 단번에 꺼버린다. 신성한 결은 그렇게 지켜내기가 너무도 어렵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난하고 얌전한, 혹은 세상을 잘못 읽어낸 삐뚤어진 다른 자아가 되어, 출근길 지하철에서 서로의 얼굴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이토록 정교하게 인간을 갈아버리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끝까지 그 신성을 지켜내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성 안에서 '인간이 지니는 것 같지 않은' 어떤 특별한 '결'을 끈질기게 지켜내는 이들이다.

더 신기한 건, 타인의 신성을 먼저 알아봐 주는 눈도 있다는 사실이다.

"야, 너 안에 뭔가 있어!"

이 한마디로 누군가의 어두운 밤을 환히 밝히는 사람들이다.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언니가 그랬다.

사실 친언니의 친구였는데, 괜히 언니들 사이에 끼어 노는 걸 좋아하던 내게 그 언니는 늘 특별한 존재였다. 이 언니는 ‘혼자 사는 게 낙’이라며 비혼을 선언하던 사람이었다. 결혼은 인생의 오점이라 여겼고, 비혼만이 해탈로 통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상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청첩장을 내밀었다. 나는 커피를 제대로 뿜을 뻔했다. 그만큼 언니는 확고한 독신주의자에 가까운 비혼 선언자였다.


하지만 결혼 전 예비 신랑의 이야기를 꺼내며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정말 뭐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진심으로 걱정 안 돼. 돈을 많이 벌든 못 벌든 상관없어. 이 사람이 앞으로 뭘 펼쳐낼지, 나는 그게 너무 기대돼."

나는 무슨 계시라도 받았는가 싶었지만, 그 종교와도 같은 열정이 오히려 예뻐보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정신이 또렷하고 말에 군더더기 없으며, 나와 항상 서로의 치부까지도 털어놓는 사이였던 언니였다. 그런 언니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사랑에 눈먼 것이 아니라 진짜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하는 벅찬 감동을 주었다. 언니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빛났고, 그 확신이 머무는 공간도 실제로 환히 빛났다. 언니의 집에 방문했을 때 들어서자마자, 집 안이 말할 수 없이 밝고 환했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니의 얼굴엔 아이처럼 맑은 빛이 어려 있었다.

최근 둘째를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을 때도, 언니는 "조금은 힘들지만, 이 사람은 어마어마한 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난 진짜 믿어."라고 말했다. 그 확신은 감동을 넘어선 뭉클함으로 다가왔고, 내게도 '누군가 나를 저렇게 믿어주면 뭐든 할 수 있겠다'는 바람을 안겨주었다.


그 말은 감동을 넘어선 무언의 경외를 불러일으켰고, 당시 나에겐 참 좋은 본보기였다. 나는 속으로 ‘이건 사랑이 아니라 믿음이구나’ 생각했다.

언니는 배우자에게서 ‘겉으로 지닌 것 같지 않은’ 어떤 결을 보고, 진심으로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 언니의 태도는 늘 그랬다. 자기 안의 신성을 지켜내는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의 신성을 '발견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한 일은, 타인의 안에 숨어있는 '진짜'의 빛을 보는 것이다.


그 빛을 알아봐 주는 순간은 진정한 믿음이고, 사랑이며, 때로는 인생 전체를 다시 그리는 힘이 된다.

현실은 시끄럽고, 나 역시 가끔 흔들리고 실수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의 신성을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한 그 번쩍이는 빛을, 내가 먼저 "너 안에 뭔가 있어"라고 전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러면 언젠가 누군가도, 나를 그렇게 봐 주지 않을까.

이 행성엔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이 살고 있다.

단지, 서로가 아직 그 빛을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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