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나는 러닝크루원들과 달리고 있는데 속옷 하나가 정말 스타일리시하게 나를 재앙으로 이끈적이 있었다.
아침 출근길, ‘오늘은 더우니 나시에 가디건이면 충분하겠지’라는 희망찬 망상 속에, 나는 나시를 입고, 가디건을 걸쳐 입었다. 그리고 그날은 나시를 입었기에 오프숄더 형태의 속옷을 입었다. 오프숄더 브라는 주로 어깨를 시원하게 드러내는 옷을 입을 때 입는다. 나시 사이로 어깨끈이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 오프숄더 브라를 종종 한다.
출근을 하면서는 '어우 오늘 좀 덥네. 역시 오늘 옷 잘입었어'하며 담백한 미소를 지으며 뿌듯하게 걸어갔다.
그날 퇴근 후, 러닝크루 모임이 있었다.
나는 조금 늦었던 터라, 퇴근 직후 집으로 폭풍처럼 돌진해 티셔츠 한 장과 레깅스만 갈아입고 얼른 튀어나왔다. 그런데 잊은것이 있었다. 아침에 입었던 끈이 없는 형태의 '오프숄더'형 속옷.
여름에 나시를 자주입어 애용하지만, 한번도 그걸 입고 러닝을 해본적은 없었다.
얘는 '러닝은 처음'이었다. 그래선지 갑자기 브라가 반란을 일으키며 아주 뜻하지 않은 악마의 얼굴을 보여줬다. 러닝크루들이 모이는 순간까지도 몰랐다.
러닝 시작 직후, 500미터까지는 그저 평소처럼 나는 내달렸다. 하지만 510m 조금 지나서부터 예감이 불길했다.
"어… 이 느낌은…??"
무언가 가슴이 시원해지면서
나는 앞을 향해 달렸고, 내 브라는 서서히 지구 중력과 하나되어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한 번 뛸 때마다 얘는 2cm씩, 3cm씩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앞으로 뛰고, 얘는 자꾸 아래로 내려가.
몸은 열심히 앞을 향해 나가는데,
속옷이 자기 혼자 자꾸 자유를 향해 나아가니 점점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점점 더 시원해지는데... 공포가 섞인 시원함이었다.
나는 공포떨며 열명정도와 달렸다. 공포 그자체였다.
그날 바람은 잔혹할 정도로 세게 불었다.
티셔츠 한 장의 보호막은 무용지물처럼 펄럭였고, 그때마다 바람은 무심하게 내 자존심을 후려쳤다.
나는 흉곽을 부여잡고 평소보다 한 30%쯤 뒤로 처져, 컨디션 난조를 연기했다.
"하...핳ㅎㅎ"
못 뛴 척, 힘든 척, 그냥… 브라 때문에 숨이 턱 막힌 척.
그러나 크루들은 러닝 페이스를 올렸고,
내미드풋 착지를 내딛을 때마다 체중 반동을 타고 브라는 더욱 용감하게 남하했다.
나의 공포는 점점 깊어졌고, 그때마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중간에 멈출 수도 없는 상황.
그래서 나는 뛰는 와중에도 슬쩍슬쩍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속옷을 끌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저 사람… 뭔가 이상한데…? 뭐 에러상항있나…?" 하는 눈빛이 날아왔다.
나는 당황한 채 팔꿈치로 브라를 고정하며, 그날만큼은 내 팔이 브라의 지지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옷 밖에서 팔꿈치로 고정하고, 반동을 줄이며 조심스럽게 초스피드 달리면서, 슬그머니 브라를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지만, 녀석은 매번 한 발 앞서 도망쳤다. 계속해서 반항하는 브라에 결국 나는 분노해 외쳤다. “저기요! 저… 화장실 좀…” 그리곤 근처에 사실 화장실이 없어 나무 뒤로 숨어버렸다.
나는 속옷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버텨줘. …” 하지만 이미 자유의 하강을 맛본 브라는, 더욱 굳세게 반란을 일으키며 자신의 길을 향해 갔다. 그날 내 브라는 물리 법칙에 충실했고, 그 충실함은 곧 폭동이었다.
나는 그날 이상한 러닝을 했다.
팔짱을 끼고 흉부를 부여잡은 채, 직립보행하는 새우처럼 내달렸다.
누가 보면 공기저항 최소화를 위한 고급진 러닝 자세인 줄 알았을 것 같다.
나는 그날, 인체공학과 절박함이 만나 탄생한 최초의 유선형 인간이었다.
옆을 지나가던 크루원이 물었다.
“오늘 페이스 좀 안 나오죠?”
나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오늘은 좀… 컨디션이 영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내 속마음은 절규 중이었다.
‘내 브라가 명치까지 내려와서, 지금 허리를 반으로 접고 뛰고 있다는 건 비밀입니다…’
그렇게 브라와 내가 각자의 길을 향해 완전히 따로 달리던 날,
나는 내적 절규와 함께 기록 대신, 깨달음을 얻었다.
“오늘의 수확: 중력을 이긴 자만이 브라를 지킨다.”
그리고 그 이후, 달리기 신조는 하나다.
흔들리지 않는 자가 진정한 러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브라 끈은 자존심의 끈이다.
러닝 시, 정신줄과 속옷줄은 반드시 챙기자.
그 후부터 나는 매 러닝 전,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중력과의 소통에 이상은 없겠지…?”
그날, 자유를 향한 오프숄더 브라의 반란은 오랜만에 탈주의 서막을 열었고,
그 사건 이후, 나의 러닝의 필수 안전 수칙엔 하나가 추가됐다. 속옷 체크.
이제 내 러닝 전 체크리스트는 세 줄로 요약된다.
정신줄, 신발끈, 그리고 브라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