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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견디는 삶에 대한 단상」

고통에 대한 나의 가벼운 생각

by La Verna

「고통, 견디는 삶에 대한 단상」 - 고통에 대한 나의 가벼운 생각


평범하게 흘러가던 하루에 갑자기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일격이 전신을 관통할 때, 삶 자체가 때때로 충격파다. 존재의 근간을 흔들면 평소 익숙했던 행복조차도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 충격은, 마음의 준비도 없는 상태로 삶의 한가운데를 덮치기 때문이다.
무언가 송두리째 무너지거나, 목소리를 잃을 만큼 강하게 다가오는 충격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한 생을 치고 들어올 때, 잔혹한 운명처럼 무참히 존재를 부순다.
때론 죄없는 사람을 죽을 죄를 지은 사람처럼 다루기도 한다.
인생에서 자신은 주인공이지만,
모두가 다음 막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여정을 걷게된다.

어제까지 잔잔한 멜로였던 삶이, 오늘은 생존이 전부인 전쟁 드라마가 되고, 내일은 뜻밖에 동화처럼 변하기도 한다.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때, 타인의 고통을 진정으로 헤아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말은 진부하지만, 이 말이 너무나 진실이어서 상상할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것으로 실감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같다.

그 감각은 오직 당사자만이 실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고통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전달이 된다. 속 타들어가는 마음을 감추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이의 표정에서, 그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아파진다. 그 머쓱한 웃음에는 나의 수준과 삶의 지평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미소 지을 수 있을까 싶은 상황에서 더 그렇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이 모든걸 잃고도, '살아 있음' 하나로 하루를 견뎌낸다.

'견딘다’는 말이 때로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견딤'은 평범한 인내가 아니라, 깊은 아픔을 관통한 자의 용기와 지혜로 빚어낸 버팀의 기술이다.

그런 삶에서 침묵은 웅변이고, 때론 해탈의 경지를 보여준다.

인생에서 정말로 무서운 건 ‘내 계획이 좌절되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가 세우는 계획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이다.

보통 삶은 계획대로 정교하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게 삶은 종종 예측불가한 방식으로 한 생을 시험하고, 때로는 잔혹하게 존재의 흐름을 꺾어 놓는다. 그것이 일상이 무너지거나, 더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목 앞에 서게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생각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혹 실험적 정신이 강하면서도 예술을 사랑하고, 약간은 심심한 존재가 아닐까 하고. 고통이라는 무거운 재료를 인간에게 덕지덕지 발라놓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보라고 하다니. 그건 사랑의 예술인가, 놀이인가, 실험인가. 하지만 고통의 상당 부분이 인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며, 그 의미는 오직 각자의 삶이라는 틀 안에서만 유효하고 의미를 갖는다.

세상이 거대한 병원이라면, 사람은 모두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환자다.

감정에 부목이 필요하고, 정신에 소독약이 필요하며, 회복되지 않은 흉터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진정한 현실(real world)이다.

납득할 수 없는, 불공평한 현실조차 기꺼이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남들이 보기엔 사소해 보여도, 개인이 짊어진 고통의 무게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때, 잠시 멈춰 서게 되고, 아주 작게나마 겸손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따금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하는 무언의 동지애를 느끼기도 한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능력에도 차이가 있다. 절망의 끝에서 다시 삶을 시작한 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위대하다.


삶의 운전대를 잡고 달리다 브레이크가 고장 날 때, 비로소 인간은 핸들을 제대로 쥐는 법을 체득하는 것 같다.


삶은 요리와도 같다. 외상이 없는 인생은 덜 익은 밀가루 반죽과 같아서 진정한 맛을 내지 못한다.

고통은 삶을 뜨겁게 데우는 필수적인 재료가 된다. 원치 않게 불판 위에 올려지지만, 그 과정을 지나야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온전해지고, 완성된다. 그 완성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게 해준다. 때론 너무 오래 뜨거워서, 마음에 물집이 잡히고, 사라지지 않는 흉터가 남기도 한다. 그러나 흉터는 견뎠고, 살아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증표가 된다.


회복의 시간은 서두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다. 인생에 외상을 입고도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회복의 시간. 육체처럼 마음에도 깁스를 하고, 느릿한 자기 성찰을 통해 삶의 근육을 다시 길러야 한다.

그렇게 무너졌던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늠름히 일어서며, 모든 것을 잃고도 "아직 남은 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정신승리가 아니다. 이미 견고하고 단단하게 빚어진, 승리한 정신을 가진 자의 당당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이끄는 새로운 지형이 있다. 우리는 종종 어중간한 과거를 붙잡고 허우적대며, 쓸데없는 후회와 하지 못한 말들로 아쉬워한다. 하지만, 인간은 흔들리고 애쓰며 조금씩 방향을 틀며 살아간다.

적당히 흔들리고, 적당히 애쓰며, 적당히 힘을 빼고 사는 만큼 고통을 통해 다른 방향으로 꺾여 나아간다. 외상처럼 아픈 변화가 때로는 사람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강제적인 방향 전환이 예상치 못하게 우리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삶의 새로운 지형으로 내가 가장 빠르게 견인될 때, 고집을 덜 부릴수록 고통은 덜하다.

그러니 삶에 외상이 찾아오거든, 너무 놀라지 말자.

그저 고통에 몸을 잠시 맡기고, 흘러가자.

삶은 계속되고, 상처는 아문다.

어쩌면 계획대로 흘러가는 인생이 불행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정교한 삶의 설계해도,

인간은 스스로가 얼마나 허술한 계획을 세우는 존재인지 잘 알지 못하며, 아주 사소한 변수 하나로도 금방 무너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절규의 끝에서, 삶을 조금 더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나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총체적 삶이라는 '큰 틀' 속에서의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는 통증을 지나야 아문다. 마음도 살갗처럼 새살이 돋고, 두꺼워진다. 그 두꺼움이 회복일지, 굳어짐일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여전히 살아간다.

삶의 고통은 때로 우리를 무례하게 바꾸지만, 놀랍도록 효과적으로 변화시킨다.

그 끝에는 얻는 것이 있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믿던 자기확신, 타인을 쉽게 재단했던 시선, ‘다 잘될 거야’라는 무책임한 낙관을 뒤집는다. 원치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고통은 필요했던 것이었다.

삶은 엉성한 문장으로 시작해 수없이 퇴고하며 고쳐 써 내려가는 과정의 반복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여기까지 온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무너지지 않고 이 순간까지 도달한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에서 ‘어’로 바꾸는 일,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삶의 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이제 모든걸 멈추고, 다시 써보라"고.

언젠가, 누군가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들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삶의 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삶은 계속되고, 그 안엔 고통이 존재한다.

하지만,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면

곧 상처는 아물고

그 자리에 다시 생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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