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친한 동생과의 만남
친한 동생이 있다. 여기선 민지라고 불러야겠다.
민지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첫인상에 완전히 사로잡혔다고 했다. 딱 자기가 꿈꾸던 이상형. 훤칠한 키, 어딘가 차분하면서도 젠틀한 분위기, 그리고 자신에게만 유독 다정한 눈빛. 능력과 재력까지 갖춘 그를 보며 민지는 '세상에 저에게 이런 남자가 올 줄은 몰랐어요.' 하고 감탄했다.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은 늘 자기 자랑이거나, 자기 말만 하고 듣지는 않는 ‘어른 남자아이’들뿐이었는데, 그는 달랐다고 했다. 사소한 자기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주고, 불편한 옷이나 구두를 신고 있을 때면 알아서 자기 옷을 벗어주거나 운동화를 챙겨오는 세심함까지. 민지는 확신했다고 한다. 드디어 자기 인생에 진짜 어른이자, 진정한 동반자가 나타났다고.
결혼 준비도 물 흐르듯 순조로웠다. 순조롭다 못해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신이 개입한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는 민지의 의견을 늘 존중했고, 양가 어른들 사이의 미묘한 기싸움이 벌어졌을 때는 민지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나서서 현명하게 상황을 정리해 줬다. "민지 씨, 제가 보기엔 이런 방법이 양쪽 모두에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내 눈엔 콩깍지지만, 민지에겐 그의 나지막하고 단호한 한마디에 모든 갈등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적을 여러 번 경험했다고한다. 민지는 늘 그와 찍은 사진을 보며 ‘이런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하고 피식 웃었고, 주변 사람들앞에서도 은근 우쭐함이 올라왔다고 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성공한 결혼이라고. 민지는 그렇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고한다. 그렇게 꿈같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달콤한 신혼 생활에 돌입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잘 흘러갔다는 게 민지의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의 팔베개를 베고 곤히 잠든 자신의 모습에 행복했고, 저녁에는 그가 주물러주는 다리 마사지에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단다. 민지는 퇴근길 발걸음이 늘 가벼웠는데, 이런 남편이라면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나는 가끔 민지를 만나면 "요즘 얼굴에 꽃이 피었네:)"라는 말을 자주 했고, 민지의 얼굴은 정말 환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민지를 만났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살짝 지친 기색이었다.
새벽 3시, 적막했던 침실에 갑자기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단다. "흐읍! 크어어어어… 컥! 츠읍- 크르릉! 흐읍!" 민지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고 했다. 옆을 보니 그가 새근새근… 아니 우렁찬 코골이 소리를 내며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거대한 드릴이 땅속을 파고드는 듯한 진동이 침대 매트리스를 타고 전해져 왔다. 민지는 순간적으로 '공사장인가?' 생각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고 했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잠꼬대. "어어허어… 야, 김 대리! 내일 안 갖다 놓으면… 느어어… 흡즙즙읍… 주거~ 쥬거~ seky 아침에 보자!… 죽여버릴 거야!"
세상의 그윽하고 스윗하고 자상한 젠틀 신랑이 아니라, 낮 동안 회사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쌓아뒀다가 잠결에 풀고 있는, 욕설과 협박이 난무하는 '분노의 잠꼬대 빌런'이었던 것이다. 민지는 그의 잠꼬대를 흉내 내며 내 이해를 도왔다. 민지는 자주 반복되는 그 잠꼬대에 자신이 알던 그때의 남자친구가 잠만 자면 회식 자리에서 부하 직원을 쥐락펴락하는 무시무시한 밤의 폭군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의상 나는 "인생이란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잠에서라도 그렇게 하나보다^^:;"라고 했지만,
민지의 머릿속에서 그의 이미지에 약간의 크랙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콩깍지는 그렇게, 새벽의 포효와 함께, 시골 경운기 소리보다 더 리얼하고 처절한 잠꼬대로 약간 벗겨져 버렸다. 민지는 말했다.
"밤에는 제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닌거에요. 꿈에서라도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걸 보니, 어쩌면 저보다 더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의 눈에는 실망감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이해와 연민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완벽하게 보였던 그에게서 처음으로 드러난 인간적인 허점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더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민지의 콩깍지는 벗겨졌지만, 그 자리에는
환상 대신 현실에 기반한, 조금은 더 단단한 애정이 자리 잡는 듯했다.
그렇게 그녀의 콩깍지가 벗겨지던 순간,
사랑이 고개를 들었다.
눈은 떠졌고, 마음은 열렸다.
눈부심이 아닌 눈맞춤으로 피어난 사랑이
그렇게, 현실 속에 뿌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