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좋다.
사람들은 시간을 이야기할 때 흔히, 시계 바늘을 따라 흐르는 '크로노스'를 떠올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숫자로 잘게 쪼개진 하루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기보다는, 시간에 이끌려 그저 흘러간다.
마무리해야 할 일정, 처리해야 할 업무, 당일해야 할 목표.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정작 '지금'이라는 상태엔 눈 돌릴 틈조차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 시간의 틈새에서, 아주 다르게 흐르는 또 하나의 시간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카이로스', 의미의 시간이라 부른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그 자체로 깊고 충만한 상태에 머무는 순간이다.
흐르는 시간 위에 서서 '지금'에 존재하는 감각이다.
퇴근길에 그냥 하늘이 예뻐서 잠깐 멈춰보는 것.
일하다가 뜻하지 않게 누가 커피를 사다 줄 때.
책을 보다 마주한 한 문장이 가슴을 울리는 순간.
평범한 순간들이 갑자기 특별해질 때, 시간은 살아움직인다.
이런 순간들은 시간이 순간 멈춘 듯하면서도,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을 경험한다.
요즘 나는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자주 놓친다.
달려야 할 일들에 시선이 고정되면, 정작 '지금'이 흐릿해진다.
일상의 사소한 아름다움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ㅡ
누군가의 은혜를 잊지 않고,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며, 작은 친절 앞에서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 있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걷는다.
그 시간은, 어떤 대단한 성취나 사건이 아닌, 그 자체에서 충분히 잘 살아내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업무를 그저 생계를 위한 '벌이'로만 여기지 않고, 그날의 의미로 남게 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주어진 일을 기계처럼 하는 대신, 그 안에 담긴 의도와 맥락을 음미하고 싶다.
이 일이 누구에게 닿고, 어떻게 도움이 될지 떠올릴 수 있다면, 일은 지루한 의무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응답이 된다. 그런 하루의 끝에서 느끼는 피로감은 버거움이 아니라 감사와 뿌듯함에 가까워진다.
나이가 들수록, 크게 성공하고 쟁취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의미 있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더 커진다.
배은망덕과는 멀고, 감사와 가까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선 자리, 내 노력, 내 능력으로 이렇게 왔다고 스스로 믿고 확신하기 시작하면, 충만함은 메말라 버리고 불평이 난무하며 비판이 쉽게 입밖으로 새어나온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지금 무탈히 내가 설 수 있는 건, 누구의 덕분이었을까.
어떤 사람의 도움, 어떤 기회와 어떤 행운이 나를 지금 가능하게 했는가?"
인간이 자신의 재능이나 기회를 거저 받은 은총이라 여길 수 있다면, 삶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겸손은 자신이 받은 것을 정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생긴다.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다.
내게 거저 주어진 것들이 내 분수보다 크고 넘친다는 사실 앞에서,
더 가지려 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나누고,
더한 것은 마땅히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 마음은 아마도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자라나는 훈련의 열매일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대부분 작고 사소한 일상에 숨어 있다.
가족과 함께한 저녁 식사,
예상보다 일찍 끝난 미팅후의 여유,
친구의 안부 전화, 아침 운동, 혼자 읽는 책 한 권.
잠시 멈춰 보면, 카이로스의 시간 위에 내가 서 있음을 깨닫는다.
순간이 하루를 이루고,
하루가 쌓여 인생이 된다면,
작고 사소한 찰나들조차 허투루 흘려보내선 안 될 것 같다.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진심으로 살아낼 때 의미가 생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짧은 찰나에도 '좋음'의 순간을 발견하게 한다.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은
시간을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시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쟁취를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는 그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다.
내가 늙어갈 생이 점점 배은망덕과는 멀어지고,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충만하기를 바란다.
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좋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