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숱한 능력들이 있다.
돈을 버는 능력, 탁월한 재능, 명예를 얻는 능력, 부를 축적하는 수완까지.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보다 '납작 엎드릴 줄 아는 능력'을 가장 고귀한 덕목으로 여긴다.
이것은 수치를 감내할 수 있는 압도적인 내면의 힘이기 때문이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수치를 온몸으로 당할 수 있는 힘이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토록 피하려 애쓰고 누구나 두려워하는 그 자리를,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하며 굴욕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내는 내면의 지구력. 그것은 결코 꺾이지 않는 강인함의 다른 이름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자아’라는 견고한 요새와 ‘신념’이라는 두꺼운 철벽을 저마다 쌓게 된다.
세월과 함께 굳어진 이러한 삶의 방식은 쉽게 경직되고 꺾이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스스로의 고집을 부러뜨리고, 자존심을 접고,
한때 모든 것을 걸었던 견고한 '내 방식'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능력이다.
필요할 때마다, 자신이 온전히 세워온 삶의 방식과 굳어진 사고의 틀을
확 꺾고, 과감히 부러뜨릴 수 있는 용기.
죽음만큼이나 아픈 통증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의지를 접어낼 수 있는 이 초월적인 결단은, 실로 숭고하다.
엄마를 떠올린다. 시어머니 앞에서 늘 자신의 방식을 접고 시댁의 방식을 따랐던 그녀.
속으로는 서운함이 있었을텐데도, 겉으로는 언제나 "네, 어머니" 하며 한결같이 미소 지었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 모습이 한때는 답답하고 안쓰럽게만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가정의 평화를 위한 깊은 사랑이었고, 자신의 마음을 낮출 줄 아는 어른의 성숙한 지혜였다.
참된 성숙이란, 그렇게 자신을 한 뼘씩 구부릴 줄 아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들은 비와 바람과 돌을 맞는 자세를 아는 듯하다.
굴욕 앞에서도 등을 세우지 않고 등까지 땅에 붙여버리는 사람.
납작 엎드려 수치를 온전히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한 사람처럼, 비가 오면 비를 온전히 맞고, 풍파가 몰아치면 온몸으로 받아낸다.
저항하거나 발버둥 치지 않고, 담담히 견딘다.
모욕이 치고 들어와도, 모멸이 비처럼 퍼부어도,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맞으면서도 도망가지 않는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깊은 수행이 이루어진다.
자신을 구부렸다 폈다가, 접었다 펼쳤다가, 밀었다 당겼다가 할 수 있는 이 유연함은 강철보다 질긴 내적 탄성이다.
이런 사람들을 지켜보노라면,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견디는 능력이 탁월할 뿐 아니라, 늘 어디서든 잘 살아남고 모두와 함께 성장해 간다.
가정에서든, 직장이든, 사회 어디에서든 독보적으로 돋보이는 존재로 견고하게 서 있다.
자신에게는 철저히 엄격하되, 타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공동의 선을 위해 담담히 자신을 이탈할 줄 아는 사람들.
나는 언제나 그들을 동경하고 존경한다. 그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축복이다.
그들 앞에서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욕망을 거슬러 내면을 다스리고, 공동의 선과 상생을 위해 스스로를 거듭 조율하는 사람들.
자기 이탈의 훈련을 일상에서 체화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은 곧 수행이며, 한 편의 치열한 수련이다.
어려운 시어머니 앞에서, 까다로운 상사 앞에서, 해묵은 감정의 응어리가 남아있는 부모님 앞에서
내적인 충돌을 감수하며 납작 엎드릴 줄 아는 사람.
미묘한 갈등이나 정치적 견해의 차이 앞에서도 품위 있게 자신을 굽힐 줄 아는 사람.
이 모든 순간에 강인함이 드러난다.
대개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은 부모가 자식에게 내리사랑을 베푸듯,
본능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고 타인을 포용한다.
상황을 이기려 하기보다 품어내고, 사람을 누르기보다 살려내며,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껴안는다.
그래서 이들은 드물고, 그 희소함만큼 더욱 아름답다.
진정한 강함이란, 언제든 무릎 꿇고 굽힐 줄 아는 용기에서 피어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굴복같지만,
수치를 무릅쓸 수 있는 용기는 사실 가장 고도의 지혜를 실현하는 행위다.
이것은 정말로 멋진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근사하고 품격있는 행동이기에 나 또한 닮고 싶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능력을 그 어떤 재능이나 성취보다 높이 평가하며 살아왔다.
납작 엎드릴 수 있는 능력은 수치도 아니고, 굴복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아의 경계를 돌파하는 인간 정신의 가장 치열한 고지이며,
가장 높은 차원의 내적 환골탈태이자 거듭남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진정한 강함을 증명하는 지혜이며, 그 종착지는 사랑으로 완성되는 삶의 예술이다.
필요할 때마다 기꺼이 납작 엎드릴 수 있는 사람, 그렇게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