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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Aug 01. 2019

파리, 스친 인연의 향기  

이년 전 일이었다.


그의 레스토랑 중 한 곳이 회사 가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언젠간 한 번 가야지 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를 다시 마주치는 게 두려워서도, 지난 과거의 추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게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우리의 만남은 어차피 그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기에는 너무 빨리 끝났고, 만남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스친 거였다고 정의하는 게 더 맞을 거 같다. 이미 그 이후로도 벌써 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학교 선배가 살고 있는 파리의 한 동네 레스토랑에서 그를 처음 보었다. 조그마한 동네 레스토랑이었고 오픈한 지 몇 달 밖에 안 되었다고 했지만, 이미 입소문을 타서 손님들은 점심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식당 안에서 먹는 이들도 있었지만, 테이블이 몇 개 없어 근처에서 일하는 이들은 테이크 아웃을 해갔다. 젊은 프랑스 사장이 혼자서 모든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고 계산까지 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우리는 기다렸다가 조그마한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고, 음식이 한 입 들어가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미 여러 번 먹어본 적 있는 요리였지만 이만큼 신선하고 맛있지는 않았었다. 나의 온 미각이 음식을 즐기고 있는 한편, 나의 눈빛은 젊은 프랑스 사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오버이고, 그의 분위기에 끌렸다. 맛있다고 하자 고맙다며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의 미소에는 푹 빠져버렸다.


그렇게 그의 레스토랑에 두 번 정도 다시 돌아갔다. 그는 갈 때마다 나를 알아봤고 우리는 몇 마디 안 되는 대화를 나눴지만 그게 다였다. 세 번째 갔을 때는 점심 식사 시간이 끝나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테이크 아웃으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는 무언가를 종이에 쓰더니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수줍게 건넸다.


쪽지에는 그의 휴대전화 번호가 쓰여 있었다. 한국에서는 남자가 관심 있는 여자에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지만, 프랑스에서는 보통 그가 자신의 번호를 주었다. 그녀에게 지금  생각할 시간과 연락을 할지 말지의 최종적 선택권을 주는 일종의 배려였다. 결혼을 하고 아줌마가 된 지금, 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20대에는 파리 지하철에서 가끔 누군가 다가와서 전화번호가 써진 종이쪽지를 슬며시 건네준 후 떠나고는 했었다.


난 며칠이 지나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누군지 밝히지 않고 맞춰보라고 했다. 자신의 번호를 뿌리고 다니는 바람둥이인지 나름 테스트였다. 다행히(?) 그는 내가 누구라는 것을 바로 답했고, 그렇게 우리는 첫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장소는 우리 집 근처의 공원이었다. 함께 호수 근처를 산책하며 이십 대의 우리는 서로의 꿈을 말했었다. 나는 아직 학생이었고, 그는 이제 막 자신의 레스토랑을 오픈한 젊은 사장이었다.


"항상 내가 꿈꿨던 레스토랑을 열 수 있어서 기뻐. 결코 쉽지는 않지만 말이야. 내 꿈은 여기를 잘 운영해서, 언젠가 같은 컨셉의 레스토랑을 파리 다른 곳에 여는 거야."




우리의 관계는 그 이후 발전하지 못하고 스쳐간 인연으로 남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때 꿈을 말하던 그의 빛나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의 그런 확신이 부러웠고, 몇 살 차이 안 났지만 이미 꿈을 이루고 있던 그의 모습도 부러웠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는 정말 첫 레스토랑과 같은 컨셉으로 파리의 주요 구역에 여러 레스토랑을 오픈했고, 그 레스토랑들 모두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그중 한 레스토랑이 당시 다니던 회사 근처에 있었다.


생각만 하고 있다가, 어느 날 동료와 함께 회사 점심시간에 그의 레스토랑에 갔다. 레스토랑이 여러 곳이니 사장인 그가 분점에 있을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했건만, 그가 거기에 있었다. 시간이 이 정도 지났으면 못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많이 변했다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세월이 지나갔음은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십 년 가까이 지나고 알아보기에는, 나 역시 많이 변했을 것이다.


점심을 먹으며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동료는 열심히 회사 이야기를 하며 열을 내고 있었지만, 내 기억은 오래전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눈을 빛내며 내 옆에 걸어가며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던 그때로. 그는 그때 말한 꿈을 모두 이루었고, 나는 마치 내 꿈을 이룬 것처럼 기뻤다. 나는 어땠을까? 나 역시 신이 나서 그에게 말했었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그처럼 꿈을 완전히 이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고 있으니 나 역시 반은 이룬 게 아닐까 하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보았다.


점심을 다 먹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갈 때까지도 여전히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그를 다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아무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혹시라도 알아봐서 말을 걸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어색한 상황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밖으로 나와 이제는 또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안을 힐끔 쳐다보자, 레스토랑 안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던 그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 역시 나를 알아봤었던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수많은 스치는 인연들에 대해. 그 인연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그리고 지나가는 시간에 대해. 스치는 인연의 향기들은 그렇게 사라지기도 하고 오랫동안 남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지나고 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흔적을 남겼고, 나는 그의 흔적을 그의 '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앞으로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나는 항상 그를 꿈을 이야기하던 빛나던 눈빛의 청년으로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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