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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y 08. 2020

인생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몇 년 전 우연히 모인 사람들과 영화 이야기를 하다 각자의 인생영화로 대화가 흘러갔다. 누군가 나에게 인생영화가 뭐냐고 묻기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이요."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중 한 명만이 대답했다.


"아 ~ 그 소소한 영화"


함께 있던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비웃는 듯한 말투에 '소소한'이라는 표현이 본래 뜻과는 별도로 '별거 아닌' 혹은 '하찮은'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써 '소소한'이라고 포장했지만,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무슨 이런 영화가 인생영화야'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곧 벌어질 신경전을 기대하다가, 나의 아무렇지 않은 수긍에 이내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맞아요. 소소한 영화"


내가 아는 '소소한'은 긍정적이고 따뜻한 형용사이다. 소소한 행복. 소소한 재미. 소소한 일상. 뭔가 대단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빛나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한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소소한 영화가 맞았다.



 

영화 초반에 한 중년 남성이 대중 앞에서 강연을 한다.


"이 세상에는 단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위너와 루저예요. (...) 이 둘의 차이가 뭔지 알아요? 위너들은 자신의 꿈을 현실화시키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걸 알고 나가서 그걸 얻어요. 망설이지 않고, 핑계되지 않고, 포기하지 않죠. 루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요. 망설이고 핑계 대고 포기하죠. 자신과 꿈을."


남자는 자신이 고안한 나인 스텝이 위너가 될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한다. 남자의 강연이 끝나고 강연장에 다시 불이 들어온다. 조그마한 교실이고, 교실에는 얼마 안 되는 학생들이 뜨문뜨문 앉아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뼉을 친다. 하지만 리차드는 확신한다. 자신의 나인 스텝이 책으로 출간만 되면 곧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미어터진 강연장에서 강연을 하게 될 것이라는.


그에게는 전투 조종사가 될 때까지 가족과 묵언수행 중인 고등학생 아들과 언젠가 미인대회에 나가서 미스 아메리카가 되기를 꿈꾸는 여섯 살 딸이 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끔찍이 사랑하는 아내와 마약을 하다 양로원에서 쫓겨난 자신의 아버지가 있다. 게이 애인에게 차인 후 자살 시도를 한 아내의 오빠가 집에 잠시 지내러 오면서 네 가족은 어느새 여섯이 된다.  


여섯 살 막내딸 올리브가 아이들 미인 대회인 미스 선샤인의 예선에 통과하고 결승전에 오라는 전화를 받으면서 가족은 시동도 잘 안 걸리는 고물 버스를 끌고 1박 2일의 여정을 떠난다. 떠난 길에서 리처드는 그토록 고대하던 자신의 책 출간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낙담한다. 리처드의 아들 또한 우연히 자실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조종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이들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리처드가 영화 초반에 강의하던 위너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올리브의 미인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떠난 이들의 여행길은 이들의 인생 여정과도 같다. 차도 제대로 안 굴러가고, 일은 꼬이고, 다투고, 낙담하고 좌절한다. 노력하면 이룰 거라고 확신했던 꿈들은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가지만. 여행이 끝날 때쯤 이들은 그것들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한 비평가는 이 영화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기고 지는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살아야만 하는 그 중간 상태에 대한 이야기'






이 영화를 20대 초반에 본 이후로 이 영화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쭉 내 인생영화로 남아있다. 아무리 좋았어도 같은 영화나 책을 두 번 보는 일이 거의 없는데, 이 영화는 여러 번을 보았다. 그걸 아는 남편이 이 영화 포스터를 십 년 전에 사줬는데, 그 포스터 역시 이사를 할 때마다 고이 잘 모셔가서 새로운 집 거실 소파 위에 늘 붙여놓는다. 왠지 이 노란색 포스터만 보고 있어도 힘이 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그저 소소한 영화라고 단정한 그녀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좋은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나 명문 중. 고 시절을 거쳐 서울대 외교과에 한 번에 붙었고, 외무고시 역시 한 번에 붙어서 젊은 나이에 외국에 외교관으로 파견 나와 있었다. 자신이 꿈꾸는 걸 포기해본 적도 혹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얻지 못하는 좌절을 경험해 본 적도 없다. 그런 그녀에게 어떻게 이 영화가 와 닿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위의 영화 평론가의 말처럼 실패와 성공 그 중간의 어딘가에서 살아나가야 한다. 완전한 성공도 혹은 완전한 실패도 하지 못한 채로. 해도 안 될 거라는 두려움과 시도해도 잘 안 되는 좌절 속에서 매일 비틀거리고 방황하며. 물론 그 중간에는 어쩌다 작은 성공을 맛볼 때도 있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이러다 평생 루저로 살아가는 거 아닌가 싶은 좌절감이 들 때면 올리브의 할아버지의 대사를 떠올린다.


얘야. 진짜 패배자가 뭔 지 아니?     지는 게 두려워 아예 도전조차 안 하는 사람이란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미인대회에서는 상상치 못할 일들이 벌어지지만. 이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스포를 하지 않겠다. 기회가 되면 꼭 보시라는 추천과 함께. 아직 이 가족의 유쾌한 한 방이 기다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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