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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y 30. 2020

남편이 그러는대

결혼 전에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 말

이십 대 중반에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결혼한 지 십 년 가까이 됐고 어린 딸이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 방송작가였던 언니는 늘 책을 끼고 살았다. 생각이 많았으며 말도 거침없었고 필력도 좋았다.


하지만 이 언니의 모든 이야기는 늘 이 한 마디로 결론이 났다.

“남편이 그러는대..”

그때는 이 말이 왜 그렇게 거슬리던지. 대놓고 뭐라고 한 적은 없지만 속으로 늘 못마땅해하고는 했다.


‘아니, 자기 의견이 없어. 왜 맨날 형부 의견만 말하는 거야.’


언니의 남편이 만나본 적도 없는 제삼자의 이야기도, 늘 그놈의 “남편이 그러는대..”로 종결 나는 걸 들으며 굳게 결심하곤 했었다.

나는 결혼해도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비단 이 언니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둘러보면 적지 않은 기혼 여성들은 이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고 있었다. 당시에는 결혼하면 자기 의견이 없어지나 회의감까지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저 말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나는 절대 그럴 일 없다고 확신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이 우리 엄마가 혹은 아빠가 그러는대라고 우길 때도, 난 한 번도 엄마와 아빠를 내세워 내 의견을 말한 적이 없었고.


이십 대는 친구들이 남친이 혹은 우리 오빠가 그러는대 할 때도, 연인의 의견을 내 논리의 지표로 삼은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자기 의견이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니까.

하지만 결혼 후 사람들과 대화 중, ‘남편이 그러는대’ 라고 시작해서 끝내는 나 자신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심지어 기혼 여성만 있는 그룹에서도 저 말의 빈도가 내가 유독 남들보다 높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다.


한 방 제대로 맞은 느낌이었다.


남을 판단하면 결국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대화중에 말하는 것도 모자라서, 내가 쓰는 모든 글에는 남편이 거의 항상 등장한다. 내 첫 책에도 두 번째 책에도, 지금 이 글을 비롯한 수많은 브런치 글에도. 아주 남편이 없으면 어떻게 글을 썼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제야 이해가 간다. 왜 그때 언니가 그렇게 “남편이 그러는대..”라는 말을 해댔는지. 언니가 자기 의견이 없어서도, 여자이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이 내 세계가 되고

그 사람의 말이 진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나만의 진리.

그건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그때 함부로 언니를 판단한 게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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