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한국에 들어가면 반드시 가야 하는 최애 장소가 몇 곳 있다. 광장시장은 그중 결코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원체 시장을 좋아하지만 광장시장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한데 모여 있다. 시장 한복판에서 걸쭉한 막걸리와 곁들이는 뜨끈뜨끈한 빈대떡이나, 소주 한 병을 눈 깜작할 새 비우게 만드는 육회.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진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다. 코로나로 여전히 그 분위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연기와 함께 사람들 사이에 옹기종기 섞여 한바탕 웃고 떠들다 보면, 모두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는 기분이다.
이십 대 중반, 한 시민단체의 나름 열혈 회원으로 활동을 할 때였다. 우리의 끝은 항상 광장시장이었다. 다 같이 시장으로 가서 빈대떡과 육회를 시켜 늦은 시간까지 지칠지 모르고 이야기하며 마시곤 했다. 여기만 오면 뭐가 그리 신나던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서 그랬겠지만, 숨넘어갈 정도로 웃었다.
작년에 잠깐 한국에 들어갔을 때, 남편을 광장시장에 데려갔다. 요리사인 남편도 시장과 길거리 음식의 열렬한 팬이기에 광장시장의 매력에 나처럼 흠뻑 빠지리라 확신하며.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연달아 감탄을 발산하며, 보이는 모든 것을 먹고 싶어 했다.
그중 한 집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는데, 갑자기 주인아저씨가 남편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았다. 남편이 프랑스에서 왔다고 하자 아저씨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두 유 노우 알랭 샤바?"
알랭 샤바는 프랑스 국민 배우이다. 남편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답했다.
"에스"
"히 워즈 히어"
남편은 금세 눈이 휘둥그레지며 되물었다.
"알랭 샤바 히어?"
"에스"
프랑스 국민 배우가 광장시장에 왔다고? 물론 그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의 사진이나 사인이 한 장도 없었기에 우리는 그가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 왔을까 궁금했다.
그러다 올해 초반, 우연히 그가 출연한 <#아이엠히어> 영화의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곧 개봉할 프랑스 영화로 배두나가 여주인공이었다. 그제야 알랭 샤바와 광장시장에 대한 미스터리가 풀렸다. 그는 한국에 영화 촬영을 갔고, 그때 광장시장에 갔던 것이다.
영화는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식당을 운영하며 혼자 사는 50대 스테판(알랭 샤바)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한국에 사는 여인 수(배두나)를 알게 되고, 연락을 하다 사랑에 빠지게 된다.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다 그녀의 ‘당신이 여기서 나와 함께 벚꽃 피는 걸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인스타 메시지에 그녀를 보러 대책 없이 한국으로 떠난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공항에 도착하지만 오기로 한 그녀는 오지 않고, 스테판은 공항을 떠나지 않고 그녀를 기다리는데. 수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포스팅한 인스타가 화제가 되면서 그는 졸지에 한국에서 스타가 된다. 그는 과연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혹시라도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해 결론은 말하지 않겠다. 남편과 함께 보기 위해 상영관을 찾는데 웬걸 영화는 극장에 나오기 무섭게 내렸다. 알랭 샤바라는 흥행 보증 수표가 있음에도 이토록 극장에서 빨리 내린 게 이상해 찾아보니 평점은 평균 이하로 낮았고 관객들의 평가도 악평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특히 광장시장이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 안 남은 상영관을 찾을 때쯤, 코로나로 자가격리가 시작되면서 결국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그러다 지난주 주말에 인터넷으로 이 영화를 유로로 대여할 수 있는 걸 보고, 남편과 함께 집에서 보았다. 이야기는 프랑스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바스크 지역에서 시작해서 중반쯤 인천 공항과 서울로 흘러간다.
스테판이 오지 않는 그녀를 공항에서 몇 날 며칠 기다리는 게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만큼, 인천공항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다. 남편과 나는 인천공항을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특히 남편은 잔뜩 신이나 말했다.
"기억 안 나? 우리도 저 식당에서 밥 먹었잖아. 나는 그때 생선 시켜 먹었는데"
"저 옆에 매번 가는 편의점 있잖아."
어느 순간 영화는 뒷전이고 우리는 가고 싶어도 지금은 갈 수 없는 한국을 영화로 보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다. 특히 영화 후반에 알랭 샤바가 광장시장에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자마자, 남편과 나는 집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누가 들으면 월드컵에서 자국팀이 골이라도 넣은 줄 알았을 것이다.
"오오오 진짜 저기 있다"
"저기 우리가 갔던 집 맞지?"
"응 맞아"
광장시장을 화면으로 보자 짙은 그리움이 밀려왔다.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울고 떠들던 곳. 주머니 사정에 상관없이 늘 배불리 먹을 수 있던 곳. 즐거움에서 소외되는 이 아무도 없이 서로의 웃음에 전염되는 곳.
한국에 다시 돌아가도 그때 그 분위기는 여전할까. 영화는 탄탄하지 못한 구성과 약한 결말로 작은 아쉬움을 안겨준 채 끝났지만. 그럼에도 남편과 나는 좋았다. 오히려 평점이 왜 이렇게까지 안 좋았던 건지 의아했다.
아마 평균보다 후한(?) 우리의 평점에는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한국에 대한 향수와 광장시장에서 쌓인 행복한 추억들이 알게 모르게 한몫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마음 내킨다고 갈 수 있는 시기가 언제 올진 아직 모르겠으나. 소중한 이들과 광장시장에서 만나 빈대떡에 막걸리 한잔하는 그날이 다시 올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