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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ul 27. 2020

큰일 났다. 글 욕심이 생겨버렸다.

큰일 났다. 욕심이 생겨버렸다. 그것도 무섭기로 소문난 '글' 욕심이. 나도 모르는 새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더니 나갈 생각 없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 책을 두 권 내면서도, 브런치를 이년 넘데 하면서도 없던 욕심이 얼마 전부터 싹을 틔우더니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다.


첫 책을 낼 때 출간 계약 후 원고를 아예 처음부터 다시 쓰는 과정에서 편집장님이 조언을 해주었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힘 빼고 써요.” 그녀의 말을 듣고 정말 힘 빼고 썼다가.. 아니라 사실 힘을 주고 싶어도 줄 힘이 내 글에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는 그야말로 '잘' 쓴다는 가정하에 가능한데, 내 글은 내가 봐도 잘 쓴 글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쿨하게 한계를 인정하고 내 능력 안에서 글을 썼다.


글을 쓰고 싶어 책을 내려던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내가 투고한 원고를 보고 연락을 준 편집장님도 '글'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했던가. 앞으로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고도 했지만. 출판사와 미팅할 때 흔히(?) 듣는다는 '글 참 잘 쓰시네요'는 인사치레로도 하지 않았다. 편집자였던 팀장님도 글에 관해서는 함구했다.


심지어 그녀는 글을 너무 잘 썼다.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기에 책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그녀의 메일을 읽을 때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때 알았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모든 글을 다 잘 쓴다는 것을. 하다못해 업무 메일까지도. 정작 원고를 쓰면서는 내 형편없는 글 실력을 탓하지 않다가도, 그녀의 메일만 보면 부끄러움이 고개를 들었다. 글은 바로 이런 사람이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당시 내 글은(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기본이 안 됐었다. 글의 가장 기본인 맞춤법, 띄어쓰기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배려심 많은 편집장님은 ‘해외에 살아서 감안하고 읽었어요'라고 했지만, 편집자는 원고를 만지며 한숨 꽤나 쉬었을 것이다.


'해외에 살아서'


정말 그래서 엉망이었을까? 사실 해외에 살며 집에서는 남편과 직장에서는 동료들과 하루 종일 불어로 떠들기에 모국어의 감이 현저히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언어는 모름지기 환경이 중요한데, 하루 종일 샬라 샬라 하고 있으니 생각도 불어로 하고 꿈까지 불어로 꿀 때가 있다. 한국을 가지 않고는 하루에 단 한 마디도 모국어로 할 일이 없는 날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쉬운 단어도 한 번에 떠오르지 않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핑계다. 모국어를 의식적으로 멀리한 지난 시간의 업보인 것이다.


중학생 때 가출 전에는 전교에서 상위권에 들던 모범생이었지만, 학교로 다시 돌아오니 '가출 학생'이라는 낙인이 붙어있었다. 낙인이라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이기도 했다. 진짜 원하는 걸 하고 싶었다. 멀리 가고, 넓은 세상을 보는 것. 그러려면 언어를 하는 게 최우선일 것 같았다. 영어는 학교에서 하니 제2 외국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알리앙스 프랑세즈를 찾아갔다.


문화원에는 내가 알지 못한 다양한 세계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문화원을 다니는 학생 중 제일 어렸는데, 이곳에서는 집과 학교와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또다시 추락할 수는 없어서. 뭐라도 붙잡어야 살 거 같아서. 언어에 동아줄처럼 매달렸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전국 어학 경시대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한 번도 프랑스에 산 적 없는 얘가’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전국 대회 수상을 할 때마다, 신생 여고였던 학교 교문 앞 플래카드도 바뀌었다. 시대를 잘 만난 덕에 수능을 치지 않고도 수시로 고3 일 학기에 대학에 합격했다. 과에서도 금방 소문이 났다. '프랑스에 산적 없는 얘가'. 교수님들은 따로 불러서 면담을 해주셨다.


한 번도 프랑스에 살지 않았으면서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려면 어떻게 했을까?


사전이 걸레가 되도록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어리석게도 의식적으로 모국어를 멀리했다. 교과서 외에 활자로 된 건 모두 불어로 읽으려 했고, 글도 일상을 제외하고는 불어로 쓰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가 얼마 후 교환학생에 선발되고, 이후 이어진 유학 생활로 모국어를 활자로 접할 기회는 더욱 드물어졌다. 그러다 보니 내 어휘력과 표현력은 중학교 이학년 딱 그 수준에 멈췄다.




그럼에도 문제의식은 갖지 않았다. 오히려 또 다른 언어를 배우겠다고 설쳤다. 서른에는 삼 개 국어를 하고 싶다는 중학교 때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를 배웠다. 그 덕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쿠바를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일단 말이 통하니 이야깃거리가 한결 풍부해졌다. 그때 여행에서 가지고 돌아온 이야기보따리 덕분에 첫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네 글은 쉽게 읽혀'. 주변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정도면 된다고 자족했다. 쉽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수준. 그게 딱 내 수준이었으니까. 애당초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지, 작가가 되는 게 목표는 아녔으니까.


하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며 좋은 작가님들을 많이 알아갈수록, 글이라는 게 다 각기 다른 맛과 향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두리뭉실 뭉뚱그려 표현할까 말까 하는 걸, 다른 작가님이 딱 맞는 언어의 옷을 입힐 때. 아 왜 난 저 단어를 생각 못했을까라는 뒤늦은 후회와 함께 부러움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맛깔스러운 글. 아련한 글. 포근한 글. 글의 종류도 색깔도 모두 다르지만, 잘 쓴 글에는 뚜렷한 작가의 색채가 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잘 쓴 글들은 이야기 그 이상을 전달한다는 것을. 그래서 손에 닿는 거리에 시집을 늘 놔두고,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트렁크의 절반을 책으로 채워 온다. 잘 썼다 싶은 글을 만나면 애정을 갖고 찬찬히 뜯어본다.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서이다.


이는 해외에 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는 모국어에 대한 향수 때문이기도 하다.

희한한 게 불어로 글을 읽으면 활자가 머리와 마음의 어디쯤 부유하는 느낌인데, 모국어로 글을 읽으면 활자 하나하나가 좌석처럼 마음에 착착 달라붙는다. 다른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읽다가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혼자 헤헤 웃거나 눈물을 훔치는 일도 부지기수다. 내 일처럼 피부로 와 닿아서이다.


만약 똑같은 글을 불어로 읽었다면 어떨까?


그냥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었을 것이다. 아무리 여러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불어로 모든 생활을 한다고 해도. 내 정서와 백 퍼센트 교감할 수 있는 언어는 모국어 딱 하나였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에 활자로 울고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


프랑스에 산 적 없는데 불어를 유창하게 하던 얘는 커서 정말 프랑스에 살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한국어로 글을 쓰고 글을 읽는 한국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어떤 언어보다도 모국어를 제일 잘 구사하고 싶다.


그래야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 테니까.


잘 쓴 글이 반드시 좋은 글은 아니지만. 언젠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잘 쓴 글로 나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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