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출발해 오후가 끝날 때가 돼서야 콩크에 있는 12세기 수도원에 도착했다. 수도원에서 배정받은 방에 들어와 창문 밖으로 산맥이 이어지는 절경을 감탄하며 바라보다 남편에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누워서 이번 길의 마지막 걸음의 피로를 풀고 있던 남편은 또 무슨 소리를 할까 싶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
"이제부터 누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해. 나는 순례자라고."
"순례자?"
"응. 맞잖아. 순례자잖아."
남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새로운 국적이 마음에 드는지 활짝 미소를 지어보았다.
"마음에 들어?"
"응. 쏙 들어."
남편은 순례자가 맞았다. 폭염에서도 폭풍에서도. 걷는 남편의 입에서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걸었지만 멈추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으로 걸었다.
가끔은 신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혹은 평온한 침묵 속에 묵묵히 걸었다. 반면 남편의 꽁무니를 쫒으며 걷던 내 입에서는 툭하면 '더 이상 못 하겠어'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남편이 두려워하는 건 딱 한 가지. 길이 끝나는 거였다. 그런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그야말로 진정한 순례자임을 확신했다.
이번 프랑스의 산티아고 길은 거의 백 퍼센트 프랑스 순례자들만 있었다. 대부분의 프랑스 순례자들 역시 원래는 스페인 순례길로 떠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로 국내 프랑스에 있는 순례길로 여정을 변경하였다.
여느 때와는 달리 외국인이 아무도 없는 이 길에서 우리의 존재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외모는 둘 다 동양인이지만 불어로 대화를 나누는 우리를 많은 이들은 신기해했다.
참지 못하고 우리에게 '어디서 왔어?'라고 물어보고는 남편이 프랑스인이라고 하면 이들의 궁금증은 폭발하였다. 파리야 워낙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국제도시이기에, 흑인이 동양인이 아랍인이 프랑스인인 게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우리가 걷는 시골에서는 희귀한 일이었다. 특히 남편의 이름이 이민자의 성이 아닌 전형적인 프랑스 성이라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대놓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거나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몇몇 이들에게 남편은 설명해 주었다. "어렸을 때 입양이 돼서 프랑스에 왔어." 파리에서는 잘 겪지 않은 일이었기에 이들의 태도가 내게는 무례하게 다가왔지만, 정작 남편은 담담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인이 아닌 이유를 해명해야 하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인인 이유를 해명해야 하는 남편의 삶이 결코 쉽지 않었겠다는 자각이 가시처럼 마음을 찔렀다.
남편의 국적은 남편의 선택이 아니었다. 입양되는 순간 입양아들의 국적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자동으로 박탈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십 년 넘게 살다 보니 내가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간간히 있다. 그들에게 한국 국적으로만 살 생각이라고 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국적이 있어야 그 나라에서 사는 게 편리하지 않냐며 대놓고 설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 국적은 이해관계나 편의에 의해 취득하거나 바꿀 수 없는 무엇이다.
이 선택을 남편은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주 파리로 돌아오기 전날 저녁. 이틀째 머물던 수도원에서 저녁을 먹다 말고 남편은 갑자기 땀을 잔뜩 흘리며 급하게 일어나더나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남편을 따라 나가자 남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쓰러질 거 같아."
나는 남편에게 먼저 방으로 올라가라고 하고 수도원의 자원봉사자 할머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할머니는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올라가서 쉬어. 저녁을 따로 챙겨놓을 테니 괜찮아지면 언제든 내려와서 먹어.
괜찮다고 번거롭게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지만 손사래를 치며 빨리 올라가 쉬라고 손짓했다. 방으로 올라가 남편은 온몸에 찬물을 뿌리고 침대에 누웠다. "괜찮아지는 것 같아". 잠시 후 미소 지으며 남편은 말했다.
"사람들이 코로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잖아. 원래 겪고 있는 증상인데. 우리가 아시아인이라 더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증상이 느껴지자마자 빨리 올라온 거야."
코로나가 초반에 아시아에서 발생했기에, 아시아인들에 대해 여전히 두려움과 편견을 갖고 대하는 서양인들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서양이 동양보다 훨씬 대처도 미흡했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피해를 보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프랑스에서 자란 프랑스인이었지만 남편도 이 편견을 비껴갈 수 없었다. 그러기에 남편은 쓰러지면서도 걱정을 했던 것이다. 그가 쓰러지면서 수도원에서 일어날 온갖 우려와 두려움에 대해.
나는 경황이 없어 그런 생각은 스치지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한 남편이 웃기기도 하는 한편 그런 생각까지 해야 하는 남편이 짠하기도 했다.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이 펼쳐졌다. 우리가 방으로 올라가고 다들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을까. 소방차를 불러야 하나 당장 내보내야 하나 논의하고 있지 않을까.
하필 돌아가기 전날 남편의 증상이 오랜만에 재발하자 속상했다. 더 속상한 건 미안할 이유가 없는 남편이 내게 미안해하고 있었고. 심지어 다른 이들의 반응까지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걱정받아야 하는 이는 본인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낯선 곳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피부로 와 닿았다.
남편이 괜찮아지자 식당으로 내려갔다. 저녁을 먹기보다는 괜찮아졌다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였다. 자원봉사자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부엌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더니 따로 챙겨놓았던 저녁을 내주었다. 자상하고 따뜻하게 챙겨주는데 뭘 해줘서라기 보다는 그녀의 진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할머니의 이름은 마리옹으로 원래 휴가에 스페인 순례길로 떠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로 프랑스에 남아 대신 이 수도원에서 순례자들을 맞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아준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수도원 안에서 지켜야 할 조항들을 사무적으로 열거하고, 중간에 질문이라도 하려고 하면 '내 말 다 끝나고 그래도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라며 무섭게 말을 끊었다.
그때 방에 들어오자마자 남편에게 말했었다. '저 할머니 조금 이상하지 않아?'. 그 이상한 할머니가 지금 우리를 돌보고 있었다. 마리옹 할머니의 따뜻함과 진심 어린 마음이 느껴져서 남편과 나는 저녁을 먹는 내내 마음 뜨겁데 덥혀졌다. 더 이상 이곳이 아는 이 없는 낯선 곳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다시 찬찬히 들여다본 그녀는 소녀처럼 맑게 웃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눈빛 깊숙이 묻어 있었다. 할머니는 글을 쓰고 교정하는 일을 업으로 한다고 했다. 우연 같은 인연처럼 다가왔다.
순례길에서는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