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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r 15. 2021

남편의 쏘~코리안 취향

남편을 보면 종종 한국인의 DNA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 살 때 프랑스에 입양되어 프랑스 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한국 음식도 한국 문화도 거의 접할 기회가 없었다. 이런 남편이 나를 만나고 생성된 혹은 재발견한 취향은 놀랍도록 한국적이어서. 가끔 우리 둘 중 가장 한국적인 사람을 꼽아 보라면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아닌 갓난아기일 때 한국을 떠난 남편일 거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더 놀라운 건 그의 한국적인 취향이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의 세대의 취향. 즉 '아재 취향'과 어딘가 모르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인데. 올해 마흔 중반인 남편은 나이로만 보면 엄연히 아재이다. 몇 년 전 한국 여행 중 시골 마을의 한 장터를 거닐고 있었는데. 장터 길목에서 장사를 하시는 한 할머니가 남편을 보고 '아저씨, 이것 좀 사가요’라고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서 남편과 웃음이 터졌던 적이 있다. 그 할머니는 이토록 구수한 외모의 남편이 프랑스인이라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외에 살며 여러 교포들과 입양아들을 만나봤지만. 겉으로 봤을 때 남편처럼 외국에서 자란 티가 안 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한국에 가면 종종 식당에서나 가게에서 남편을 보며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라고 말하곤 하는데. 남편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이고. 잽싸게 그런 남편에게 불어로 통역을 해주면, 그제야 ‘아 한국 사람 아니세요?'라며 놀라곤 한다.


남편의 쏘~ 코리안 취향들은 다음과 같다.


1. 즐겨 듣는 노래 : 산울림의 <너의 의미>


정확히 말하면 예쁜 아이유가 리메이크한 버전을 좋아한다. 집에서 삼겹살에 소주나 막걸리를 곁들여 먹을 때. 나름 한국에 있는 듯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가요를 트는데. 중간에 이 노래가 나오면 남편은 눈을 반짝 반짝이며 '내가 좋아하는 노래다'라며 신나서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물론 가사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라는 첫 소절만 들어도 탄성을 지르며 입이 귀에 걸리는 남편을 보며.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명곡을 알아본 남편이 신기할 따름이다.


2. 빠질 수 없는 소스 : 들깨 가루


들깨 가루의 묘미를 깨달은 남편은 아낌없이 부어 먹는다. 순댓국에도 떡국에도. 심지어 삼겹살 소스를 만들 때도. 외국에서는 한국 들깨 가루가 금가루 가격이기 때문에, 소심하게 나는 살살살 뿌릴 때, 듬뿍듬뿍 부어 먹는다. 들깨 가루뿐만 아니라 들기름을 안 이후 거의 모든 국 위에 몇 방울씩 떨어트려 섞어 먹는다. 들기름의 맛에 눈을 뜬 후로 참기름은 뒷전이 되었다. 하긴 이 고소하고 깊은 맛을 어떻게 배겨낼 수 있단 말인가.


3. 한국 가면 제일 먼저 가는 곳 : 찜질방


남편은 한국에 갈 때면 떠나기 전부터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한다. "여독을 풀어야 하니까, 짐 풀고 저녁에 찜질방 가서 자면 되겠다" 잠 귀가 예민한 나는 찜질방에 가면 쉬이 잠을 청하지 못한다. 하지만 남편은 찜질방 한구석에 편안히 누워 밤새 틀어진 티브이 및 다른 이용객들의 수다 등, 잡다한 소리 한가운데서도 가끔 코까지 골며 양질의 수면을 취한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목욕재계까지 한 후 세상 개운해하며 나온다.


서울에는 남편이 애용하는 찜질방이 몇 군데 있다. 내가 저녁 늦게까지 지인들과 술 약속이 있는 날이면, 남편은 이때다 싶어 눈을 빛내며 말한다. "그러면 나는 오늘 찜질방 가서 자면 되겠다" 예전에는 나의 거의 모든 약속에 동행했지만, 한국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남편이 식사 내내 속사포 같은 한국어 수다 가운데 앉아 있는 것도 나름 고욕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같이 아는 사이가 아니면, 내가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면 남편은 콧노래를 부르며 찜질방으로 향한다.


찜질방 들어가기 전, 바로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순대와 오뎅에 튀김까지 시켜 먹은 후. 저녁에는 목욕탕에 내려가 야식으로 컵라면과 맥주를 먹고. 얼음이 둥둥 떠있는 식혜에 맥반석 계란을 까먹는 것도 절때 잊어먹지 않는다. 아침에 목욕을 하고 나와서는 편의점에 들려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


4. 남편의 최애 간식 : 전병과 약과


남편은 내가 '옛날 간식'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좋아한다. 전병과 약과만 있으면 남편의 저녁은 해피하다. 가끔 한국에서 엄마나 동생이 약과를 보내주는데. 저녁에 늦은 시간에 퇴근해서 약과를 먹으며 "음~ 이건 고급 약과야. 맛이 달라"라며 음미하는 남편을 보며 남편의 한국인 DNA는 과연 어느 시대로부터 왔을까, 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5. 소주는 역시 오리지널 참이슬


몇 년 전부터 다양한 과일맛 소주들이 출시되며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남편은 여전히 오리지널을 고집한다. 과일향이 첨가된 소주는 진정한 소주가 아니라는 게 남편의 주장이다. 문배주 같은 고급 전통주보다 오리지널 쐬주를 훨씬 선호한다. 참이슬을 제일 좋아했지만, 깔끔하고 청량한 한라산 소주 맛을 알게 된 후로 순위를 앞다투고 있다. 제주도에 여행 갔을 때 한라산 소주 공장까지 방문했을 정도이다. 남편이 즐겨 마시는 한라산 소주는 물론 21도이다.


앞에서 열거한 것들 외에도, 남편의 한국적인 취향을 일일이 말하자면 끝이 없다.


사람이 세 살이 지나서 겪은 일만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데. 태어나 겨우 삼 년이란 시간만을 한국에서 보낸 남편의 무궁무진한 무의식 속의 한국이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 무의식 세계 안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한국인의 DNA가 나보다 더 깊숙이 박혀 있는 거 같다  그래서 남편에게 한국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큰 기쁨이다.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되어’ 아이유의 청량한 목소리 위로 청량한 소주가 제주 바다처럼 출렁이는 소주잔을 연거푸 원샷으로 비우며. 취기가 잔뜩 오른 얼굴로 터질듯한 삼겹살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주고. 그걸 우걱우걱 씹으며 너무 커서 삐져나온다고 뭐라고 하는 나에게, 웃으며 예쁘다고 말하는. 이런 남편이야말로 내게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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