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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Apr 03. 2021

<내가 유난히 좋아지는 어떤 날이 있다>

내가 유난히 미워지는 날, 단숨에 읽어 내려간 책

내가 유난히 미워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 반복되면 몸도 마음도 저 깊은 수심 어딘가에 무거운 돌덩이와 함께 가라앉아 영영 떠오르지 못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돌덩이를 떼어낸 후 수면 위로 헤엄쳐 나올 수도 있지만, 물속에 웅크리고 앉아 바라만 본다. 따스한 봄날이 돌아왔고 창밖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빨갛게 부어오르며 하나둘씩 불쑥불쑥 튀어나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혔다. 영화에서 보면 괴물이 인간으로 변할 때처럼 처방받은 약을 먹은 후에야 그 울퉁불퉁한 것들이 고개를 숙이며 들어갔다. 그것들을 잠재우는 약이 얼마나 독한지는 몰라도 먹으면 정신이 조금 혼미해졌다. 20대 후반에도 한참 알레르기로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병원에 갔지만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외부의 특정한 성분에 대한 반응으로 비롯된 알레르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밤이면 몸을 덮는 알레르기 때문에 새벽마다 잠을 설쳤고, 자도 전혀 잔 것 같지 않은 기분과 몸으로 아침을 맞이하곤 했었다. 그때는 그래도 깜깜한 밤에만 모습을 드러냈다면, 이번에는 환한 아침을 맞기 무섭게 당당하게 찾아왔다. 그렇게 한 일주일간을 약을 먹지 않고서는 일상이 유지될 수 없어서, 깨어있는 시간을 꿈에서처럼 비몽사몽 보냈다.


불안과 두려움에 짓눌리던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밤이면 찾아오던 알레르기는 마음이 몸을 통해 나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그 이후 완전히 사라져서 그 시기를 나름 잘 극복했다고 믿었는데,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지금 온몸에 난 알레르기로 또다시 고생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아니 오히려 후퇴했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웠다. 유난을 떠는 몸도, 몸을 유난 떨게 만드는 예민한 내 자신도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마음에 숨구멍 하나 없어 숨 쉬는 것조차 힘들 게 느껴지는 그런 밤이었다. 뭐에 끌리듯 리하 작가님의 책 <내가 유난히 좋아지는 어떤 날이 있다>를 집어 들었다.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책을 받은 건 벌써 보름 가까이 됐지만 진도를 전혀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책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당장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제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었다. 당연히 글도 쓰지 못했다.


리하 작가님은 브런치를 통해 알게 된 동화 작가님이다. 벌써 여러 권의 동화를 집필하셨는데, 브런치에서 작가님의 일상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이야기들을 에세이집으로 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잔잔하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작가님만의 문체와 담백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에 종종 위로와 희망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마 전 작가님이 첫 에세이집을 출간하셨다는 글을 봤을 때 내 일처럼 뛸 듯이 기뻤다.


여태껏 작가님의 글을 읽어오면서 이런 글은 좀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사이트로 주문해서 얼마 전 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한국에 있는 한 친구에게 선물로 보냈다. 내 책은 가족에게 부탁해서 우편으로 부쳐달라고 해야지 생각했는데, 그날 생각지도 못한 메일을 받았다. 브런치를 통해 온 메일이었는데 열어 보니 리하 작가님이셨다. 꼭 책을 보내주고 싶으니 주소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해외로 우편을 보내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잘 알기에 괜찮다고 하려다가. 일부러 메일까지 주셨는데 거절하는 것도 아닌 거 같아서 주소를 드렸다. 며칠 후 새벽에 눈이 떠져서 휴대폰을 보다 깜짝 놀랐다. '작가님 우편번호도 알아야 한대요...' 주소에 우편번호를 넣었지만 프랑스에 살지 않으면 그게 우편번호라는 걸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아차 싶었다. 헛걸음하신 건가 싶어 답변을 하고 조금 있으니 메일이 왔다.


아까 제 남편이 우체국에서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심부름 보냈어요^^
프랑스에서 공부했던 후배가 프랑스 앞에 써있는 숫자가
우편번호라고 알려 주어서 금세 보낼 수 있었어요.
언제 도착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히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요~~


아이고 그냥 보내지 말라고 할걸. 작가님 남편분에 후배분까지 동원되셨을걸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책은 보름 후 작가님의 예쁜 손편지와 함께 도착했고. 작가님이 어렵게 보내신 책을 정말 죄송하게도 시작만 하고 여태껏 끝내지 못하고 있다가, 그 밤에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간 것이다.




프롤로그 첫 문장부터 마음에 콕 박혔다.


내가 미운 날이 많았다. 그때의 나는 몹시 불안했고 힘들고 지쳐 있었다. 보잘것없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수록 내가 점점 미워져서 쳐다보기조차 싫었다. <...> 불만과 불안을 껴안은 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수많은 시간을 뭉텅뭉텅 소비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미운 나를 괴롭혔다.


작가님도 나랑 비슷했구나. 책을 통해 작가님을 재발견하며 깊은 공감을 했다.


나는 굉장히 나약한 사람이다. 내 의도와 다른 상황이 펼쳐질 때나 누군가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도 마음의 중심을 못 잡고 그대로 나가떨어진 적이 많았다. 감정이 요동을 치니 규칙적인 생활이 어려웠고, 동화원고도 쓸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극복해 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읽으며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내 상처를 극복한 기억과 극복하면서 생긴 힘은 나만 살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른 고민과 상처를 지닌 누군가에게로 가서 닿는다. 때론 타인의 고민과 상처가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극복한 상처에서 나온 내 경험이 필요한 친구도 있다. <...>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다독이는 과정을 거친 사람은 자신과의 화해가 가능하다. 화해의 기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에게도 기꺼이 자신의 고민과 상처를 보여줄 수 있고 그런 과정을 거치며 연대할 수 있게 된다.


자신과의 화해의 과정을 통해 연대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야기와 글이 가진 매력이자 힘이 아닐까. 나 또한 내가 유난히 미운 어떤 밤에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잠시나마 자신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으니 말이다. 에필로그에는 땅속이 아니라 공중의 줄기에서 뿌리가 나와 아래로 드리워진다는 신비한 인도고무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우리 안의 '실낱같은 무엇'이 인도고무나의 '막뿌리'처럼 '희망의 막뿌리'가 되어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뿌리 내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무시하지 않을 생각이다. 뿌리는 꼭 정해진 곳에서만 나온다는 편견을 깰 것이다. 오래 걸리더라도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한 내 안의 여린 뿌리들도 하나둘 자라날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뿌리들은 분명 내 삶을 단단히 받쳐 줄 것이라 믿는다.


공중의 줄기에서 뿌리가 나와 땅속 깊이 파고들며 굵어진다는 인도고무나무. 이 이야기는 여전히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태풍이 불면 부는 대로 언제라도 뽑힐 듯 흔들리기만 하는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어쩌다 한번 봐도 반가운, 그런 친구 같은 책이었으면 좋겠다는 작가님의 바람처럼. 유독 혼자라고 느껴지던 밤에 오랜만에 조우한 친구처럼 반갑게 이 책과 마주했다. 지금의 모든 고민과 불안의 시간이 언젠가는 단단한 막뿌리로 내려 작가님의 말처럼 나무가 되고 또 함께 숲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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