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오전 그녀에게 카톡이 왔다.
"형원~ 한창 출근할 시간인가?"
일요일마다 그녀는 법륜스님 온라인 명상을 보내준다. 그때 간간이 짧게나마 서로 안부를 묻기에, 바로 그다음 날인 월요일에 그녀로부터 연락이 온 건 조금 의외였다. 반가움 마음과 궁금한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매년 자기한테 마롱 그라세 얻어먹기만 하고 우린 암것도 못해줘서 맘에 걸렸었어. 일단 자기 이사했으니 주소도 받아야 하고. 나는 센스가 부족해서, 알아서 짠! 선물 고르는 거 잘 못해. 먹고 싶은 거 말해봐"
고마운 마음이 왈칵 들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마롱글라세(밤을 설탕에 절인 프랑스 디저트)라는 겨울에만 나오는 디저트를 그녀에게 보내고 있다. 우리는 벌써 칠 년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녀에게 참 고마운 게 많다. 아무것도 모르고 첫 번째 책 초고를 썼을 때. 가장 먼저 투고를 한 곳이 그녀의 출판사였는데, 다음 날 바로 연락을 준 것도 그녀였으며. 처음으로 책 번역을 했던 것도 그녀 덕분이었다.
게다가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그녀의 동네 시장에서 나의 최애 음식인 순댓국과 막걸리를 매번 얻어먹곤 한다. 술을 잘 못하는 그녀는 얼추 분위기를 맞춰주느라 몇 잔 마시고는 얼굴이 벌게진다. 내 책도 번역한 책도 그다지 팔리지 못한 나는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썩 반가운 작가는 분명 아닐 텐데. 그럼에도 그녀는 칠 년 전 첫 출판사 미팅 때보다 나를 훨씬 더 따뜻하게 대해준다.
서로 먼 곳에 살아, 내가 한국에 갈 때만 드문드문 보는 사이임에도 이상하게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진다. 작년부터 그녀가 매번 일요일이면 법륜스님 온라인 명상 링크를 보내주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연락을 하다 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몇 년 전 브런치에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것도 그녀의 제안이었다.
지난해 내가 번역한 책이 나왔을 때도,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줬는데. 책 몇 권이 큰 소포로 왔길래, 뭐지 하고 뜯어보니 이런저런 한국 식품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편집자한테 물어보니 그녀가 바리바리 싸와서 함께 보냈다고 했다. 덕분에 지난해 한국도 못 들어가는 상황에서 요긴하게 남편과 함께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내가 하는 거라곤 매번 크리스마스 때 그녀가 좋아하는 밤 디저트를 보내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녀가 먹고 싶은 걸 말하라고. 보내주겠다고 했을 때 손사래를 쳤다. 이번에는 회사가 보내는 거라 했지만. 그걸 또 사로 가야 하는 번거로움과 우체국에 가서 국제 우편으로 보내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그녀에게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몇 번이나 주소를 달라고 했지만 주지 않았고. 고맙지만 마음만 받겠다고 끝끝내 거절하자, 그녀는 '에잉, 서운해'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녁에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남편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그러면 서운하지. 정말 해주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텐데. 네가 그 마음을 거절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 아니 나는 번거로울까 봐 그랬지..." 말을 하다 보니 아차 싶었다. 나 역시 그녀의 선물을 직접 지방에서 주문해서 받아. 그걸 또 우체국에 가져가 한국으로 부친다.
매번 내 것도 주문할까 고민하다가도. 왠지 그건 사치라고 여겨져서, 맛 한 번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 잠깐의 번거로움보다 그녀가 받을 때 얼마나 즐거울까, 그걸 상상하는 기쁨이 훨씬 더 크다. 그래서 그녀가 보내지 말라고 해도 보내는 것이다. 그녀가 받기까지 나에게 보내는 선물인 양 설레며 기다리고. 도착해야 하는데 안 받은 거 같으면 걱정되고. 받았다고 연락 오면 뛸 듯 기쁘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주는 즐거움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서서 막은 것이다.
특별한 일 없이도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작은 선물을 즐겨한다. 항상 좋은 걸 보면 저건 누구 주면 참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한국에 갈 때면 큰 트렁크 하나가 부족할 모자랄 정도로 선물을 챙겨가, 정작 우리 짐 들어갈 자리가 부족해 남편이 불평할 정도이다. 평소에도 서프라이즈 선물하는 걸 좋아해서, 가끔 일찍 출근해 동료의 책상 위에 작은 선물을 놔두기도 한다.
주변 이들이 평소에 관심 있던 것, 먹고 싶었던 것. 그런 것들을 기억해 놨다가 지나가다 보일 때 사서 '짠'하고 주는 걸 좋아한다.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주는 기쁨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지나가듯 별생각 없이 말한 것들을 생각지도 못한 순간 선물로 받는 이들의 감격 어린 표정에 행복과 뿌듯함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아주 잠깐이나마 기쁨을 선사했다는, 그 기쁨을 나는 나에게 선물한다.
반면 나 자신에게 하는 선물에 대해서는 스크루지가 따로 없다. 티셔츠 하나 사는 것도 수십 번 고민을 하고, 심지어 슈퍼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는 것도 늘 고민한다. 돈 쓰는데 눈치 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에게 쓰는 건 늘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그렇다 보니 남에게 선물을 하면서 대리 만족을 하는 부분도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선물하는 데 있어 엄격하다 보니. 다른 사람이 뭘 해주려고 하면 대개 손사래 치는 편이다. 그게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생일도 마찬가지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동료들이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는데. 다른 동료들의 생일에는 나서서 계획하고 함께 선물도 마련하면서. 내 생일은 꽁꽁 숨기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 생일이 지나 우연히 알게 된 동료들이 왜 말을 안 했냐고 했다. 그때도 내가 잘한 줄 알았다.
부담 주기 싫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받는 게 어색해서이다. 어색하다 보니 자꾸 마음이 쓰인다. 마음이 쓰이니 받은 건 어떤 방식으로든지 돌려줘야 마음이 편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안 받는 건 또 아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러니 그냥 받을 때는 기쁘게 받고, 줄 때도 기쁘게 주면 되는 것이다. 기뻐하며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이 제대로 줄 수나 있을까.
받는 즐거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주는 기쁨을 정작 줄줄 몰랐던 것이다. 준다는 게 정말 상대를 위했던 건지. 혹 주는 기쁨을 욕심쟁이처럼 홀로 독차지하려고 했던 건 아닌지. 상대에게 부담 주기 싫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여태껏 나는 상대방의 주는 기쁨까지 빼앗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받는 기쁨만 주었지 주는 기쁨은 줄줄 몰랐던.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셈이다.
누군가 말했다.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길다고. 이 말에 깊게 공감했다. 받는 건 그때뿐이지만 주는 건 줄 때까지, 주고 난 후에도 지속되기 때문이다. 긴 기쁨인 주는 기쁨을 주는 법을 조금씩 연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