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형원 Jan 31. 2021

창작의 다른 편에 서보니

그녀에게 전화가 온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휴대폰 액정 화면에 그녀의 이름이 뜨면 반가운 마음보다 한숨이 앞서는 건. 그녀의 연락은 크게 두 종류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필요하거나. 문제가 생겼거나. 아니면 둘 다이다. 모든 게 잘 되고 있을 때는 물론 아무 소식도 없다. 무소식이 정말 희소식인 셈이다. 반년 가까이 나와 거의 매일 같이 연락을 하고 있는 그녀는 현재 제작 중인 다큐의 연출을 맡은 감독이다.


내가 기획한 다큐지만 엄연히 연출은 따로 있고. 연출가가 최상의 조건에서 연출을 하고. 기획 의도를 잘 구현할 수 있게 지원하며 함께 논의해 나가는 것은 제작사의 몫이자 나의 책임이다. 내가 처음 기획한 장편 다큐이고. 구성안을 작성하는 초창기부터 봉쇄 중 촬영을 마치고 편집에 들어간 지금까지. 여러 고개를 넘어 이 단계까지 왔기에, 나 또한 감독 못지않게 애착이 강하다.


하지만 연출에만 집중할 수 있는 감독과 달리, 나는 처리해야 하는 일들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들도 부지기수이다. 독립 다큐가 아닌 회사에 속해있고, 다른 제작사들도 엮인 공동제작이다 보니 홀로 쉬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다 보니 감독과 여러 관계 속에서 가교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자주 발생하는데. 되도록 창작자를 존중하고 싶은 마음에 감독의 요구 사항들을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게 늘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감독의 요구 사항이 예산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할 때는 더더욱. 픽션 영화만큼은 아니겠지만 한 편의 장편 다큐가 완성되기까지는 많은 인력과 예산을 필요로 한다. 간단한 장면이라 해도 촬영에 대한 인력과 장비에 결코 적지 않은 예산이 소모된다. 애니메이션이나 아카이브가 들어간다고 하면 애니메이션은 작가를 섭외해서 작업해야 하고 아카이브는 대부분 구입해야 한다.


연출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욕구지만. 감독은 늘 최대한 많은 소스를 확보하기를 원한다. 촬영 소스. 아카이브 소스. 애니메이션 소스 등. 그래야 결코 짧지 않은 러닝 타임 동안 보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게 풍성한 그림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큐는 결국 영상으로 하는 이야기이기에, 이미지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뒷받침할 수 있다. 넘쳐서 많이 못 쓰더라도 부족한 것보다는 낫다.


자기 작품에 욕심 있는 감독이라면 편집 단계에서 요리할 수 있는 재료를 충분히 마련하고 싶어 한다. 자기 이름을 걸고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누구나 감탄을 연발하며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그런 요리 같은 작품을 꿈꾸며. 취사선택할 수 있는 소스를 많이 보유하기를 희망하지만,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슬프지만. 결국 이 모든 건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피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든 재료들을 주로 홀로 앉아 글로 요리하는 작가와는 달리. 감독의 모든 추가 구상은 추가 인력 및 추가 예산을 의미한다. 감독의 욕심이 결국은 작품에 대한 욕심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당연히 들어주고 싶고 또 들어주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하지만. 회사라는 큰 조직에 속해 있고, 예산이 단지 우리만의 예산이 아닐 때도 있어서 난처한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그럴 때 회사로부터 욕을 들어먹는 것도 고스란히 내 몫이다.


"안 된다고 해"


안 된다고 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머리와 마음은 별개다. 하나라도 더 해줄 수 있어서. 그래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면 솔직히 다 해주고 싶다. 회사에 속해있지 않았다면 개인 재산을 까먹었을지도 모른다. 감독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상사와 평소에 없는 마찰까지 몇 번 있었다. 상사의 입장에서는 회사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하는데. 회사가 고용한 감독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감독 개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니었다. 창작자와 작품을 우선순위에 두었기에 그랬던 것이었다. 그런 갈등을 알리 없는 감독은 종종 이런저런 불만을 늘어놓고, 그보다 더 자주 걱정을 한다. 지난가을, 촬영을 목전에 두고 2차 봉쇄가 확실해지면서. 촬영을 못하면 어떡하지, 매일 같이 전화로 걱정을 쏟아붓던 그녀였다. 다행히 촬영이 무사히 잘 끝나서 편집에 들어갔건만. 그녀의 걱정은 어떻게 된 셈인지 줄어들 줄 모른다.


물론 알고 있다. 그녀의 불만과 걱정이 대부분 자신의 불안에서 오는 거라는 걸. 원래 성격이라는 것도. 잘하고 싶어서. 욕심을 갖고 열심히 하려다 보니 그렇다는 걸. 반년을 겪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만. 아는 것과는 별개로 가끔 벅찰 때가 있다. 프리랜서 감독에게는 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만, 회사에 속한 나는 다른 프로젝트도 구상 및 진행해야 하고 그 외의 수많은 자잘한 일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다.


한창 바쁠 때 그녀의 전화가 오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곤 한다. 항상 '이것만'이라며 너무 간단하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도 종종 있지만. 이번에는 안 된다고 해야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도. 어려울 거라고 한참을 말하고서도. 전화를 끊고는 어떻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자신을 보며, 나는 틀려먹었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두 번의 출간을 하며 두 곳의 출판사와 일했던 경험을 종종 떠올렸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 첫 번째 편집자와 작업한 추억들도 새록새록 솟아난다. 물론 나와 감독처럼 거의 매일 같이 연락을 하거나 자주 보지는 않았고. 작업의 성격상 혼자 하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들도 지금의 나 같은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내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출판사에 별다른 큰 요구 사항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건 내 생각일 것이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함께 했던 출판사 두 곳 모두 다 내 의견을 존중해 주고 거의 대부분 반영을 해주었었다. 그때는 당연한 건지 알았는데. 이렇게 창작의 다른 편에 서보니, 그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역지사지.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의 이 한자성어는 역시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었을 때야만 백 퍼센트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면서. 앞으로 감독의 전화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야지, 결심해 보지만. 이 다큐 제작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과연 가능한 일일지는 장담은 못 하겠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와 함께한 삼 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