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봐. 발자국 소리가 들려"
"괜찮아. 동물 소리야"
"정말 괜찮은 거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라 이들의 집이야. 동물이 돌아다니는 게 당연하지"
비박을 시작했을 때 한밤중 텐트 주변을 거니는 동물의 발자국 소리는 사람 발자국 소리만큼 또렷이 들렸다. 늦은 밤에 이곳을 지나갈 사람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면 시킬수록 미세한 소리도 수상하게 들렸다. 하루 종일 십 킬로 가까운 배낭을 지고 3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었기에 머리만 땅에 대도 잠에 곯아떨어져야 했지만 두려움은 안간힘으로 수면을 이겼다.
그런 나와는 반대로 남편은 눕기 무섭게 텐트가 떠나가라 신나게 코를 골았다. 이 낯선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누구도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없는 인적 드문 자연 속에서의 깊은 밤. 어쩌면 저렇게 집 마룻바닥처럼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살짝 원망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몇 밤을 더 보내야 남편처럼 평온하게 두려움 없이 잠들 수 있을까. 한참을 뒤척이다 소변이 마려워 텐트 밖으로 나갔다.
텐트 밖으로 나갔다 혹여 주변을 배회하는 동물이라도 마주칠까 무서워 웬만하면 꾹 참고 동이 트기를 기다렸지만. 이날은 도저히 참기 힘들어 헤드랜턴을 켜고 텐트 밖으로 나가 깜짝 놀랐다. 하늘에 촘촘히 박힌 수많은 별들로 텐트 밖은 내가 상상했던 짙은 암혹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밤하늘은 별들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 우리의 하룻밤 보금자리가 돼주고 있는 자연은 아름답고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올여름 삼주 동안 남편과 함께 지난해에 시작한 프랑스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어 걸으며 비박을 했다. 그전까지는 걷다가 오후가 되면 순례자 숙소에 도착해 다른 이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도미토리에서 잠을 잤다면. 이번 순례길은 하루 종일 길에서 보냈다. 식료품 장을 보는 것 외에는 실내에 거의 발을 들여놓지 않고. 하루 종일 자연 속에서 걷다가 아무도 없는 들판이나 숲에서 남편과 홀로 텐트를 치고 잤다.
비박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이전부터 있었다. 길과 숙소를 반복하는 패턴 안에서는 여전히 소비 구조와 일상의 안락함을 떠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숙소에 들어가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에 길에서 발걸음을 재촉했고. 숙소에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일상의 편리함을 찾기 시작했다. 따뜻한 샤워와 시원한 맥주. 몸을 뉠 침대와 인터넷 등이었다. 하지만 매번 두려움으로 길을 떠나기 전에 비박을 포기하곤 했었다.
비박을 하면서는 길을 빨리 마치는 게 목표가 아닌 최대한 길에 오래 남아서 걷는 게 목적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트레킹 코스 주변에 한해 법적으로 저녁 8시부터 그다음 날 오전 8시까지 길에서 비박이 허용된다. 그렇기에 최대한 오래 걷고 해가 떨어지기 시작해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비박을 할만한 장소를 찾았다. 주변이 온통 금빛 석양으로 물들 때까지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남편도 말했다. "이제야 숨을 쉬는 것 같아". 매 순간 숨을 쉬기에 살아있지만. 아주 오랫동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느낌이었다. 세 번의 봉쇄와 통금 및 이동 제한을 겪으며 일 년이 넘는 시간을 대부분 집에 갇혀 보낸다는 것은 힘들고 갑갑한 것 이상으로 내면의 본질적인 무언가가 변하는 느낌이었다.
두려움의 무게가 커지면 커질수록 통장의 잔고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통장의 숫자가 이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를 지켜줄 유일한 무기라도 되는 듯. 미비하게 느껴지는 잔고를 보고 또 보면서 이 숫자가 얼마로 늘어야 우리가 안전할 수 있을까라는 물거품 같은 계산을 수없이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비대해지는 건 얇은 통장 잔고가 아닌 밑도 끝도 없는 불안이었다. 그런 스스로가 낯설고 어색했다. 지난 일 년 동안 집에 갇혀 있다고 마음까지 장막을 치고 외부의 신호를 종종 위험으로 감지했고. 두려움과 불안으로 만든 벽은 갇힌 집보다 더 단단하고 확실하게 숨통을 조여왔다.
텐트 밖으로 나와 별로 가득한 밤하늘을 보는 순간 좁은 텐트 안에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홀로 두려움에 떨며 잠도 못 이루던 자신이 많이 우스꽝스럽고 조금은 측은하게 느껴졌다.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와 비박 후 처음으로 깊고 평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저렇게 수많은 별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믿음 아래. 그다음부터는 비 오는 날이 아니면 텐트의 외부를 덮는 천을 치지 않고 잠에 들었다.
텐트를 덮는 외부 장막 하나를 덜어냈을 뿐인데 더 이상 자연에서 보내는 밤이 두렵지 않았다. 장막에 가려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을 때는 온갖 상상으로 무서운 야생 동물과 위험한 인간들을 만들어 내고는 했는데. 어둠 속에서도 달도 보이고 별도 보이자 근처 동물들 발자국 소리가 들려도 '저건 여우겠구나' 하면서 편안히 잠들었다. 오히려 소리가 나는 게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지구의 다양한 생명체들과 공존하는 느낌이었다.
어둠에 잠겼던 건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