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년 만에 드디어 동생을 만났다. 바로 옆 국가인 독일과 프랑스에 살면서도 코로나로 이년 가까이 보지 못하고, 지난해 말에 파리에서 보려고 했건만. 그 계획마저 동생이 오기 직전에 코로나에 확진되면서 무산되었었다.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시간들을 이년 가까이 통과하면서 언제부터인가 눈에 보이는 것에 눈에 띄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의 성과. 통장 잔고. 내 집 마련 등. 지나칠 정도로 무심하게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무색할 만큼 눈에 보이는 것들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팬데믹처럼 예상치 못한 외부의 사건이 닥치면 흔들릴 수 있는 있는 일상 위에 견고한 돌담을 쌓고 싶었다. 돌을 옮기다 쓰러지겠다 싶을 때도 여러 번 있었지만. 돌을 잘 쌓아야 나와 사랑하는 남편을 지킬 수 있는 돌담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시시포스처럼 언덕 위로 돌을 밀어 올렸다.
물론 돌은 언덕에 도달하기 전에 보기 좋게 굴러 떨어지곤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돌을 끙끙거리면 힘겹게 밀고 올리는 동안에는 이 돌이 아늑하고 안전한 돌담을 만들어 줄 거라는 기대 혹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언덕 위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보이지 않는 언덕 너머로 갈 자신은 없었다. 쉬지 않고 일하며 어느새 하나였던 돌이 여러 개가 되었고. 눈을 떠보니 돌담이 완성되기는커녕, 여러 돌덩이를 위태롭게 동시에 굴리고 있었다.
동생과 팬데믹 전에 함께 갔던 이태리 바에서 와인 한 병을 시켜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동생은 독일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있다. "예고나 대학 동기들 중에서 수석으로 입학해서 조명받던 친구들 중에 이제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당시에는 대학 입시에 떨어져서 낙담하던 친구가 파리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수석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도 하고.. 인생은 정말 모르는 거 같아."
"이런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은 자기 개성이 강하고.. 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이 있는 거 같아... 내가 봤을 때는 엄마와 언니한테도 그 힘이 있거든..."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나아가는 힘. 그런 힘이 내게도 분명 있었다. 그렇기에 머나먼 이국으로 떠날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정년이 보장된 직장에 사표를 낼 수 있었고. 통장 잔고가 텅텅 비어있어도 아니다 싶을 때는 과감하게 인생의 향로를 바꿀 수 있었다.
그런데 손에 쥐는 돌멩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가진 것을 잃는 게 두려워진다. 이 돌멩이들을 움켜쥐느라 정작 발밑에 다이아몬드를 줍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꽉 지고 있는 손을 펼치면 이마저 놓칠라 더욱 움켜쥐며,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는커녕 눈앞에 있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탈한 지난 이년의 세월을 겪으며 보이는 것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해준 말처럼.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뤄져 있다. 사랑. 믿음. 꿈. 두려움.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주춤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마음의 실선이 모여 삶의 굵직한 선을 만들고. 우리는 그 선으로 삶의 지도를 그리며 나아간다.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를 사냥하는 법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원숭이의 호기심을 유도하기 위해 나무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돌멩이를 집어넣으면 사냥꾼이 가고 원숭이가 와서 그 구멍으로 손을 넣어 돌멩이를 잡는다. 아무리 돌멩이를 빼려 해도 구멍이 작아 손이 나오지 못하는데, 돌멩이를 포기하지 못한 원숭이는 그렇게 있다 결국 사냥꾼에게 잡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원숭이의 이야기를 듣고 딱 요즘 내 꼴이라고 생각했다. 손에 쥔 돌멩이를 놓지 못해 구멍에 갇힌 기분. 그래서일까. 불안했던 코로나 시국에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하건만. 마음 한 중앙에는 돌멩이만 한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반가운 봄은 언제나처럼 찾아왔다. 올봄에는 꽃구경도 자주 하고.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반가운 얼굴들도 찾아가 보고. 그동안 무심했던 몸도 챙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