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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Aug 18. 2018

제주, 강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저 혼자 자유로워서는 새가 되지 못한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 이문재 <농담> 중


 
ⓒ 주형원


처음 제주 올레길을 걸었을 때는 8년 전 여름이었다. 제주에 놀러 왔다가 뭘 할까 고민하다 우연히 7코스를 걷게 되었다. 어차피 해수욕이나 가만히 앉아서 쉬는 휴가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코스보다 난이도가 조금 더 있는 7코스를 걸으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가슴이 뚫리는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길 위에서 걷고 있을 때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이건 단순한 느낌이 아닌 앞으로 내가 나아갈 길에 대한 직감이었다. 삶에서 당시에는 특별한 의미 없게 보이는 조그마한 경험이 나중에는 더 큰 무언가의 계기가 되어 자꾸 자석처럼 잡아당길 때가 있는데 나에게는 그때 올레길을 걸은 경험이 그랬다.


그 이후에 일 년 하고도 반년이 지난 후, 나는 겨울에 혼자서 삼일 동안 올레길을 걸었다. 1월 제주의 추위는 다른 그 어떤 곳의 추위보다 견딜만했고, 나는 삼일 동안 홀로 관광객이 없는 고요한 제주를 걸었다.


그때 길에서 우연히 나처럼 홀로 걷고 있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친구를 만나 하루를 온전히 함께 걸었다. 나보고 '목욕탕 갔다가 마실 나온 동네 주민'인 줄 알았다는 그와는 그때 이후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걸으며 참 많은 대화를 했다.


ⓒ 주형원


“천천히 시간 될 때마다 와서 올레길을 완주할 거예요. 좋은 길만 골라서 걷기보다는 하나씩 차례대로 걷는 게 더 좋아요”


잠시 한국에 들어와 제주에서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단 삼일로 한정된 까닭에 멋있다고 하는 길만 골라 걷고 있던 나에게 그 친구에 말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친구의 길에 대한 생각은 삶에 대한 생각과도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작은 회사에서 일한다며 그는 웃으며 말했다.


“잘 알려진 직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보람 있고 즐겁게 일하면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이 만들어낸 절망에 갇혀 지내며, 그 해 겨울 올레길을 걷던 나는 참 건강하고 밝던 그에게 내가 부정하고 있던 어떤 희망을 보았다.


비록 길에서 잠시 스친 인연이라도 다른 이에게서 내가 앞으로 걸어야 하는 희망의 길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언젠가 스치는 다른 이에게 희망의 길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만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내 희망이 문을 닫는 시각에
너는 기어코 두드린다
나의 것보다 더욱 캄캄한 희망 혹은 절망으로

- 최승자 <희망의 감옥> 중


제주 해녀 ⓒ 주형원


나는 그 친구에게 신나서 말했다.


“나는 산티아고 길을 걸으려고”

“산티아고 길이 뭐예요?”

“스페인에 있는 굉장히 오래된 순례길인데 완주하는 데 약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해."

"올해는 거기를 걷는 게 꿈이야.”

“스페인이요? 멋지네요!”


실제로 나는 그 가을에 까미노 길 중 가장 올레길을 닮은 바다와 산이 있는 북쪽길을 일주일간 걸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그다음 해 여름에 산티아고 프랑스 길을 혼자서 한 달 남게 걸어 완주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산티아고 길을 몇 회에 걸쳐 걸었으며, 결국에는 그 산티아고 길을 여러 번 함께 걸은 남편과 작년에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그 산티아고를 걸은 이야기를 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어 겨울에 한국에 잠시 들어가게 되었던 나는 또다시 며칠 동안 제주에서 올레길을 걸었다.


겨울의 제주 ⓒ 주형원


겨울, 제주의 바다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웠지만 이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뭔가 허전한 것을 느꼈다. 여태까지는 제주도에 와서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지니고 걷는 것을 즐겼다면, 이제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지금의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이런 풍경 앞에서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서라고 여태까지 믿고 살았다면 이제는 그게 충족이 아닌 결핍 그 자체에 대한 증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알았다. 난 더 이상 진짜 강한 사람도, 진짜 외로운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전국적으로 극심한 폭염이 닥친 이번 여름, 한국에 휴가를 온 나와 남편은 함께 그 올레길 일부를 함께 걸었다. 주위에서는 이 더위에 걷지 말라고 말렸지만, 우리는 걸을 수 있는 데까지만 걸어 보자 하며 걸었다. 남편은 마치 살을 태우는 듯한 이 더위에도 길을 걸으며 행복해했다. 그런 그를 보며 최승자 시인의 <희망의 감옥>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저 혼자 자유로워서는 새가 되지 못한다.
ⓒ 주형원


제주의 올레길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까지 그리고 다시 올레길에 함께 오기까지 어쩌면 홀로 그리고 함께 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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