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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Aug 27. 2018

파리, 사랑은 가까운 곳에

지난주 주말에는 거의 두 달 만에 잉그리드를 만났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잉그리드의 뒷모습이 보였고 난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갔다.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나를 알아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두 달 만에 보는 그녀의 빛나는 얼굴을 보자마자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참 신기한 일이다.


이제 막 오랜 외로움이라는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누군가를 만나 함께 빛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이들의 얼굴을 모두 다르지만, 이들로부터 퍼져 나오는 그 환한 행복의 빛은 모두 같으니 말이다.


나는 파리의 지하철 출근길에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 밤을 꼬박 지새우고 아침이 되자 직장이라는 가혹한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서로를 떠날 때 모습을 가끔 목격하고는 한다.


이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한데, 이들은 겨우 잘 해봐야 하루나 이틀을 보지 않고 곧 다시 만날텐데도 마치 몇 달 아니 몇 년은 헤어져야 할 사람들처럼 서로를 애타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겨우 발걸음을 뗀다.


난 이런 이들을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입가에 절로 미소가 생기고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난 티브이에서 방영해주는 휴머니즘 다큐보다는 아침 출근길 이런 시작하는 연인들의 헤어짐에 듬뿍 묻어 나오는 아쉬움에서 세상에 여전히 희망이 존재함을 느낀다. 그리고 떠올린다.


'아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물론 알고 있다. 곧 '사랑의 질풍노도'가 저들을 덮칠 것이고, 저들은 곧 그 파도에 의해 너덜너덜하게 된 후에야만 인생이라는 결코 순탄지 않은 바다의 항해를 함께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물론 이 중 대부분의 연인들은 곧 몰려올 파도에 의해 산산이 흩어져 제 짝을 만날 때까지 다시 외로운 표류를 시작하겠지만.  


다시 저 때로 돌아가라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남편과 지금에 오기까지 강산이 바뀐다는 십 년이라는 세월이 넘게 걸렸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두근거림은 지났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행복한 부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저 애끊는 눈빛을 보고 있자면 어디선가 그리움이 몰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파리 예술의 다리에 걸린 사랑의 자물쇠 ⓒ 주형원

 



잉그리드는 친한 프랑스 친구인데 몇 년 전 사진 수업에서 만나 친해졌고 수업이 끝났어도 종종 연락을 하며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었다. 잉그리드는 이제 삼십 대에 들어섰는데 조그마한 체구에 어딘가 모르게 아시아계의 느낌이 들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가족 누군가는 아시아계라고 확신하고 물어봤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는 바로는 전혀 없다고 했다.


그녀는 3D 디자이너로 샤넬, 랑콤, 루이뷔통 같은 유명 브랜드들의 제품 및 부스의 3D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녀와 친해져서 이런저런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다 나는 그녀가 어플을 통해 남자 친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어플들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아니 왜 이런 친구가 그냥 남자 친구를 만들지 못하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미모는 아니었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배려와 늘 얼굴에 미소를 지니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잘 웃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자 그녀는 말했다.


"드디어 남자 친구가 생겼어"


"저번에 말한 그 사람?"


"아니. 그 사람이랑은 결국 잘 안되고 새로 만났는데. 첫눈에 반했어"


"어떤 사람이야? 사진 있어?"


그녀가 보여준 사진에는 그들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에는 누가 봐도 매력적이고 끌릴만한 외모의 한 남자가 있었고, 게다가 연하라고 했다. 나는 내심 그녀의 능력에 감탄하여 그녀가 연인이 생긴 것을 축하해 주었다.

 

파리 사랑의 자물쇠 ⓒ 주형원


그들은 '첫눈에 반한 사이' 답게 보통 파리의 커플들보다 속도가 빨랐다. 파리의 연인들은 일반적으로 일이 년 정도 만난 후 동거에 들어가고, 동거에 들어간 후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배우자로서의 기본 법적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동거 계약을 하게 된다.


결혼은 이 모든 절차 중 순전히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아이가 생겨 부모가 되어도 평생을 동거인으로서 같이 사는 커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잉그리드는 만난 지 반년 정도 되었을까 현재 룸메와 함께 사는 집을 나와서 남자 친구와 이사를 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반년이 채 안되자 동거 계약을 하기로 했다면서, 관공서에서 계약 사인 후 주변 사람들과 조그마한 파티를 할 예정이라며 초대를 하였다.


동거 계약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약혼과 비슷한 결정이기 때문에, 나는 약간은 서두르는 듯한 이들의 속도에 놀라고 또 걱정이 되었다. 사실 이 조바심이 그를 만나기 시작한 이후 잉그리드를 만날 때마다 느껴졌던 것이 었기에 더 그랬을지 모른다. 당연히 축하하러 가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예정 날짜 삼 일 전에 잉그리드에게서 뜻밖의 문자를 받았다.


"문제가 생겨서 이번 동거 계약식은 미루기로 했어. 미안해. 다시 연락할 게"


동거 계약은 결혼만큼 복잡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관공서에 모든 서류를 제출하고 서명식 날짜를 몇 달 전에 받아야 하는 여러 절차가 있고, 무엇보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정식 동반자로 공표하는 날이기도 하기에 나는 며칠 전에 취소되었다는 사실에 놀랬다.


그 이후 잉그리드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사소한 말다툼에 계약식 직전에 그녀를 떠났다는 것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돌아왔다는 것.  다시 헤어졌다는 것 그리고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 알고 보니 그가 다른 여자들도 만나고 있었다는 것. 또다시 혜어지고 그녀가 심리 치료를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작년 가을, 파리의 한 바에서 만난 그녀는 누구보다 잊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만이 지닌 절망적인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녀는 나에게 물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이지. 하지만 지금 그리고 너를 통해서는 아니야"


"온전히 자신 스스로 변해야겠다고 진정으로 깨닫고, 엄청난 노력을 하기 시작할 때만 가능하지. 아무도 그걸 대신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어."

 

"하지만 너는? 그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파리 튈르리 공원 ⓒ 강인석




그녀는 기다림 대신 스스로 변하는 것을 택했다.


한 번도 온전히 혼자가 되어본 적 없고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렵다던 그녀는 조금씩 혼자 있는 법을 배워가기 위해 노력했다. 운동을 하고 요리를 배우고 심리치료를 받고 친구를 만났다. 예쁜 아파트를 찾아 혼자 사는 공간을 꾸몄다.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금씩 즐기기 시작했다.


물론 전 연인을 잊고 그때 받았던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까지 그 이후로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야 했다.


봄에 그녀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나는 오랫동안 그녀로부터 이야기만 들었던 그녀의 다른 가까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도 항상 얘기만 들은 나를 직접 만나 반가워했고 서로를 소개하는데, 그녀의 사촌이 한 남자를 가리키며 '잉그리드의 베스트 프렌드야'라고 소개했다.


나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작 그녀의 가장 가까운 남사친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 의아했다. 그를 처음 본 나에게도 그와 잉그리드가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고 마치 오래된 커플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반문했다. 


'왜 저런 사람을 놔두고 여태까지 그렇게 다른 사람을 찾은 거야'


그 이후 잉그리드를 만나서 슬쩍 떠보자 그녀는 무슨 말인지 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내 다른 친구들도 다 그 이야기를 해. 왜 둘이 사귀지 않냐고. 그는 정말 나의 소울 메이트야. 그와 함께 있으면 너무 즐거워. 하지만 그가 특별히 남자로 느껴지지는 않아. 그래서 좋은 친구로 지낸 거야."


"연인이 되기 위해 시도는 해본 적 있어?"


"아니 없어. 한 번 시도를 해볼까 생각이 들더라도 괜히 좋은 친구랑 어색해지는 게 두려워서"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볼 만한 가치는 있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봄이 지나가고 슬슬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 파리의 한 테라스에서 저녁 늦게 까지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여름휴가 시즌이 되어 두 달 가까이 못 만났다가 휴가에서 돌아와 다시 본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그녀의 행복을 그리고 그 행복의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한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생마르탱 운하 ⓒ 주형원


꺄날 생 마르땅에 있는 한 이태리 식당의 테라스에서 시원하게 마시던 아페롤도 끝나가고 '음'을 연발하며 손가락을 빨아가며 먹던 맛있는 오븐 피자도, 서로의 휴가 이야기도 거의 끝나가자 나는 이제 슬슬 그녀에게 질문을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질문을 하려는 찰나에 그녀는 나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너한테 할 고백이 있는데. 아마 내가 미쳤거나 바보 같다고 생각할 수 있을 거야"


"알아. 무슨 말을 할지"


"알아? 진짜?"


"응"


"어떻게?"


"몰라. 그냥 아까 너 보자마자 알았어"


 그리고 그녀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너를 알아온 시간 중 네가 가장 행복하고 평안해 보였거든'


그녀는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나는 정말 행복해. 우린 너무 잘 맞고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너무 잘됐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뭔데?"


내가 사랑에 빠졌는지는 잘 모르겠어



"왜? 떨리지 않아서? 설레지 않아서?"


"응"


"잉그리드. 잘 들어. 너 말 그대로 사랑에 빠지다야. 이 말은 사랑에 빠졌다가 나올 수 있다는 거지. 영원한 게 아니라 일시적인 상태를 말하는 거야. 지나가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거지."


그래서 사랑을 한다와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전에 연인을 만났을 때 너는 분명히 사랑에 빠졌었어.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데 그때 네가 사랑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 너를 보면 느껴져. 사랑에 빠진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을 하고 또 받고 있다는 걸"


"맞아. 나도 이 전의 그 힘든 관계가 어쩌면 지금의 그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던 가 싶어"


"아마 그럴지도 몰라. 또 그때는 네가 그런 관계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필요했을 수도 있고. 모든 관계든 다 소중한 거고 돌아보면 다 그때의 자신에게 필요했던 거 같아."


결론이 어땠든 간에 말이야. 모두 과정인 거지. 너에게 맞는 사랑을 찾아가는.


그녀를 안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서 충만한 행복을 보았던 나는 출근길에서 사랑하는 연인들을 볼 때처럼 흡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희망했다.  


이 세상에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그리하여 세상이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 차길.


파리 센느강의 연인들 ⓒ 주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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