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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Sep 03. 2018

파리, 향긋한 드립 커피 한 잔

회사 근처에는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제대로 내려주는 아주 조그마한 커피집이 있다. 파리에 몇십 년 만의 폭설이 내린 지난겨울, 문득 천천히 내린 드립 커피를 마시고 싶어 찾다가 발견한 곳이다. 프랑스 하면 카페의 나라답게 꽤나 다양한 커피들이 있을 것으로 상상되지만, 프랑스인들의 커피 취향은 의외로 놀랄 정도로 심플하다.


대부분 쓰디쓴 엑스프레소를 즐겨 마시고, 조금 오래 커피를 만끽하고 싶다 하면 엑스프레소에 물을 탄 알롱제를 마시는 정도이다. 이런 프랑스인들의 취향을 반영해서인지 파리에서는 카페에 가도 커피 종류가 다섯 가지를 넘는 경우는 드물다. 위에서 말한 엑스프레소와 알롱제를 제외하면 잘해야 카푸치노와 카페라테가 전부다.



우리나라처럼 카라멜마키아토니 돌체라테니 하는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맛의 다양한 커피들은 스타벅스에만 있지 전형적인 파리 카페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파리지앵들은 뜨거운 여름에도 항상 커피를 따뜻하게 마셔서 여름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를 마시는 게 익숙한 한국 관광객들은 종종 낭패를 본다. 카페에 이런저런 커피 종류가 열 가지는 훌쩍 넘고 계절에 따라 다르게 마실 수 있는 우리나라와는 정 반대되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양한 원산지 커피가 비치되어 있고, 여러 방식으로 커피를 뽑아내는 소위 말하는 전문 커피점도 우리나라에 비하면 거의 없다. 그래서 수십 년 만에 수북한 눈꽃 망토를 걸친 파리에서 드립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르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입 안에서는 벌써 드립 커피만의 그 잔잔하고 그윽한 향이 퍼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수십 년 만에 수북한 눈꽃 망토를 걸친 파리 ⓒ 주형원


인터넷으로 찾아보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회사 가까운 곳에 커피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조그마한 전문 커피점이 나왔다. 회사에서 걸어서 오분 거리에 있음에도 모든 가까운 것들이 그렇듯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회사는 오페라 근처라 관광객이 많은 지역답게 관광객 중심의 식당과 카페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골목을 파고들면 단골들만 가는 식당과 카페도 적지 않게 있는데, 이 카페도 그중의 한 곳인 거 같았다. 카페에 따로 간판이 있지 않아 찾는데 조금 애를 먹었다. 골목을 돌고 돌다 찾아서 들어가니 얼마 안 되는 테이블과 커피 기기가 보였고, 우리가 오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는 무뚝뚝한 표정의 주인아저씨가 있었다.


Téléscope 카페 입구

그럼에도 일단 들어가면서부터 코를 간지럽히는 그윽한 커피 향에 이곳에 온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프랑스의 카페에도 분명 커피 향이 나기는 했지만, 그건 이런 향긋하고 은근히 번지는 커피 향이라기보다는 진한 엑스프레소의 코를 찌르는 쓴 향에 더 가까웠다.


나는 드립 커피를 시켰고, 프랑스 사람보다는 영국이나 북유럽 느낌이 나는 주인이 천천히 커피를 손으로 내리는 모습과 향긋한 커피 향을 눈과 코로 천천히 음미했다. 주인은 그 후에 우리에게 두 개의 필터 커피를 가져온 후 유리로 된 커피잔을 놓더니 마치 와인 테이스팅처럼 각각의 커피 원산지를 설명하며 정성스럽게 따랐다.


동행과 나는 감동하며 커피 한 목음을 목으로 넘겼다. 커피는 좋은 와인처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혀 끝에서 목으로, 목에서 몸으로, 몸에서 마음으로 퍼져나갔다.


카페 주인과 카페의 핸드드립 커피
행복했다


커피 한 잔에 이토록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니. 지리멸렬하게만 느껴지는 일상이 이토록 간단하게 마법에 갈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이런 커피와는 대조되게 주인아저씨는 갈 때마다 옆에 짐을 치우라는 둥 여기 말고 저기 앉으라는 둥 무척이나 까다롭 게 굴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무슨 안 좋은 감정이 있나 했는데 보니까 모든 손님에게 기본적으로 친절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이 카페에 대한 평점도 별 다섯 개 아니면 하나였는데, 별 다섯 개 준 사람들은 커피 맛과 분위기를 말했고 별 하나 준 이들은 주인의 불친절함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특히 카페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손님들의 불평에 대해 카페 주인아저씨는 그답게 늘 단호하게 답하고 있었다.


"여기는 카페지 사무실이 아니야"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더 이상 그 카페에 가지 않게 된 건 그런 주인아저씨의 까칠함(?)때문이 아니었다. 슬슬 그런 까칠함이 정겨움으로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그곳에 함께 가던 지인과의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카페도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서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 또 봄이 오고, 어느새 언제 눈이 그렇게 내렸다는 듯 또 여름이 찾아오자 나는 그곳에서 천천히 내려주던 드립 커피 향이 슬슬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 만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드립 커피를 한 모금하자 커피가 서서히 입안을 감으며 각각 다른 맛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곳 커피는 진하지 않아도 여운이 길었다. 한 번 멀어졌던 서로의 마음의 거리가 다시 좁혀질 순 없어도 입안에 퍼지는 향만큼은 좋은 추억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Téléscope 카페 주인아저씨


그때 주인아저씨가 함께 일 하는 젊은 직원에게 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또 뭐라고 하려고 그러지’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을 때 직원이 우리 쪽으로 와서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손님 거 아니에요?”


무슨 말인가 해서 보니 그의 손에는 지난겨울에 내가 늘 두르고 다녔던 긴 노란색 목도리가 들여 있었다. 어디서 잃어버린 지 기억도 나지 않아 칠칠맞지 못한 자신을 탓했던 내가 좋아하던 목도리였다.


“어 맞아요”


내가 놀래서 직원과 주인을 번갈아 보며 고맙다고 하자 주인아저씨는 나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겨울에 놔두고 간 목도리를 여름까지 간직해준 것도 감동인데, 몇 달 동안 오지도 않은 손님을 기억했다가 먼저 알아보고 목도리를 돌려주다니.


순간 마음이 커피보다 더 향긋한 향으로 가득 찼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감동을 받는다는 것. 일상에서 이보다 더 멋진 선물이 있을까. 이제는 그 카페에 돌아서면 주문을 하기도 전에 주인아저씨가 먼저 물어본다.


"드립 커피?"


커피 한 잔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일상이 특별해짐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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