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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Oct 22. 2018

이사

삶에는 떠날 때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파리에서 사 년 가까이 산 집에서 갑작스러운 계기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여태껏 파리에 십 년 넘게 살면서 이사를 열 번도 더 넘게 했지만 이토록 오랜 시간을 보낸 집은 처음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일 년 가까이 여행을 하다가 다시 파리에 돌아와서 살게 된 집이라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일은 그만 둔지 일 년이 지나서 남은 통장 잔고로 이 집의 월세를 내면서 파리에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잘해봐야 몇 개월이었고, 아직 다시 파리에서 온전히 정착하기로 결심을 하지 않았을 때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잘해야 몇 달 길어야 일 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여태껏 수많은 이사를 다니며 했던 생각과 같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찾았고, 그 후에 몇 번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 찾기를 반복하면서도 이 집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작년에 결혼을 하고도 계속 이사 가야지만 반복하고 지금까지 이 집에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 집은 늘 하녀 방만 전전하던 내가 파리에서 여태껏 살았던 집 중 가장 좋았는데, 복층 스튜디오로 조그마한 테라스가 있는 곳이었다. 위층 다락방 침대에 누우면 창문으로 구름이 떠다니는 게 보였고, 날이 좋을 때는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며 저녁을 먹었다. 결코 넓거나 모던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빈티지한 매력이 있는 집이었다.


집이 위치한 파리 근교의 말라코프라도 내가 이 집을 좋아하는데 한몫했는데, 이곳은 대도시인 파리보다는 프랑스 남부 마을의 분위기가 났다. 지하철에서 나오면 새소리가 들렸고, 조금 더 걸어가면 시청이 나오는데 시청 앞에는 분수가 나오고 아이들이 늘 광장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날씨가 좋을 때면 퇴근하는 길에 광장의 단골 카페에 앉아 아이들이 행복하게 뛰어노는 소리를 들으며 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와인 혹은 맥주를 한잔 하고 집에 들어가고는 했다. 건물도 높은 층의 건물은 하나도 없고 흡사 프랑스 남부의 건물들처럼 모두 밝은 파스텔 계열의 색깔을 입고 있었다.


그토록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 가서 많게는 일 년 적게는 몇 달씩 살아보기도 했지만 한 번도 내가 사는 곳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말라코프에서는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지닐 수 있었다.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고 일주일에 세 번 광장을 중심으로 큰 장이 들어서며 광장 분수대를 중심으로 늘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이 곳에서 만큼은 내가 사는 세상이 평화롭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기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작년 초에 결혼을 하고 둘이 함께 살게 되니 스튜디오라 아무래도 개인 공간이 전혀 없고 좁은 느낌이 있어 이사 가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전혀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는 물론 게으름도 한몫했을 테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 집에 생긴 애착도 있었다.


그렇게 이사를 하루하루 미루다가 전혀 상상치도 못한 계기로 단 한 달 만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 테라스에서 영화 라따뚜이에 나올 만한 조그마한 생쥐를 목격한 것이다. 부랴부랴 쥐덫을 사서 테라스에 설치했지만 이 똑똑한 생쥐는 덫에 걸리기는커녕 미끼로 놔둔 치즈만 쏙 빼가고는 했다.  


회사에서 공문을 보내면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있다'라는 문구가 자동으로 뜨곤 한다. 아마 모든 직원들에게 열심히 일하라는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한 메시지 같은데, 이 영리한 쥐에게 매번 치즈만 뺏기다 보니 쥐덫에 있는 치즈가 꼭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로 영리한 쥐는 저 치즈를 먹을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생쥐를 테라스에서 처음 봤을 때는 놀랐지만 테라스에서만 있는다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생쥐가 모든 종류의 구멍을 통해 집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서 온 실수였다. 어느 날 저녁 집 소파에 앉아 있는데 생쥐가 거실을 쏜살같이 달려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보통은 사람이 있으면 피하기 마련인데 이제 생쥐는 버젓이 내가 거실에 있을 때도 자기 집처럼 활보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이사를 갈 때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바로 한 아파트 임대 사이트에 들어가 괜찮아 보이는 광고에 연락을 했더니 마침 그다음 날이 관심 있는 이들에게 집을 방문시키는 날이라고 했다.


그렇게 방문을 하고 한 달 만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다른 종류의 덫을 사서 생쥐는 결국 잡았고, 이사를 갈 때까지 다른 생쥐의 흔적을 전혀 보지 못했던 걸 보면 우리를 이사 가게 했던 그 생쥐는 혼자였던 거 같다.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다가 결국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생쥐 해프닝(?)으로 초고속으로 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이사를 하려고 보니 가장 힘든 건 짐을 싸는 자체가 아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갈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이건 단순하게는 짐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했지만,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뭔지 알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어떤 물건들은 언젠가 사용하겠지 하면서 벌써 몇 번째 이사 동안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여태까지 사용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사용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번에는 이런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기로 결심했다.


아까워서 사용하지 못하고 '더 좋은 기회가 있으면'을 말하다가 날짜가 지나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들어진 것들도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버리면서 후회하며 버리다 보니 인생도 이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은 단 하나도 버릴 게 없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차마 버리지 못해 지니고 있거나 '더 좋은 날'을 기다리다가 영영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짐만 늘어나고 있었다.


늘어난 짐 말고도 이 집에서 사 년이나 보내고 이사를 하려고 하니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했다. 언제 사 년이라는 세월이 벌써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나 싶고 그동안 뭘 했나라는 자책도 들었다.


물론 이 집에 들어와서 나는 내 첫 책인 '여행은 연애'의 원고를 끝냈으며, 이 책이 세상에 나오는 걸 숨죽여 지켜보았고, 그다음 해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여전히 안정되지 못한 채 배회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집에 있는 짐을 정리하며 지난 몇 년을 들여다보니 까마득히 잊었던 많은 나의 지난 몇 년의 모습이 보였다.


회사에서 돌아와서 새벽까지 다락방에서 원고를 쓰고 있던 순간들, 처음으로 암실에서 스스로 인화한 흑백 사진들을 뿌듯해하며 정리하던 모습, 가끔 기분이 울적해질 때면 시를 베껴 쓰던 시간들, 하루하루 밀려오는 절망감과 싸우기 위해 매일 밤 일기로 마무리하던 밤들.


집을 정리하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갈까 고민하면서 하나하나씩 들쳐보니 벌써 잊혀가는 나의 모습들이 보였다. 그동안 지인들에게 받았던 손편지나 쪽지도, 조그마한 선물들도, 여행지에서 가져왔던 작은 추억들에서 잊었던 많은 추억들이 모두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며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하게 덥혀졌다.


추억이 쌓인 건 비단 이 집 안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동네를 다니다 보니 이 동네에 처음 도착해서 지금까지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일요일 아침이면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광장의 단골 카페와 예술 영화를 주로 상영해 주는 동네 단골 영화관. 주말이면 장이 들어서고 동네 가족들로 붐비던 광장. 마치 전혀 다른 세계를 방불케 하는 오랜 골동품과 포스터로 뒤덮인 동네의 바.


그리고 그 장소들에서 각각 다른 고민들을 하고 각기 다른 이유로 행복해했던 내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지나갔다. 이 모든 추억에 나는 이 곳에서 지난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고, 어쩌면 이토록 순쉽간에 지난 사 년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는 떠날 때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거 같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인생의 또 다른 멋진 챕터를 쓸 수 있기를 기대하며, 지난 몇 년 동안 꿈꾸고 행복했었던 나의 집과 동네에 작별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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