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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Apr 27. 2019

봄의 숲으로 초대합니다

파리에는 서울과 다르게 도심이나 외각에 산이 없고 숲만 있다. 처음에는 이 점이 아쉬웠다.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오를 산이 없다는 것은, 높은 봉우리에서 아래를 내다보며 느끼는 일종의 성취감(?)을 느낄 수 없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숲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숲은 산과 다르게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없기에, 불필요한 도전 정신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다를 정상이 없기에 목적지를 올려보는 대신 내가 걷는 숲 길의 경관을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시선도 자연스럽게 여유로워졌다.


도시의 빌딩들은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나도 나랑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서 있지만, 숲은 계절마다 변신을 한다. 이런 숲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기는 계절과 계절 사이의 봄과 가을이다. 그중에서도 죽음과 탄생이 함께 공존하는 봄의 숲에서는, 평소에 미처 느끼고 살지 못하는 생명의 신비를 어설픈 도시인의 시선으로 목격하게 된다.


봄의 숲에는 앙상한 가지에 돋아나는 새순과 숨이 떠나 바스락거리는 잎사귀 사이를 뚫고 나오는 조그마한 푸른 생명이 보인다. 수명을 다해 부러진 나무의 밑동에 낀 이끼 위에도 푸르고 가녀린 줄기들이 자라났다.


상처를 입고 와도, 미움을 품고 와도, 봄 숲에서는 마음이 생명력을 되찾고, 그 자리에는 새순이 돋았다. 그럴 때는,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은 거라는 말이 자연에게도 사람에게도 꼭 맞지 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내가 좋아하는 숲은 비 내린 다음날의 숲이다. 오랜 갈증을 해소한 숲의 향은 평소보다 진하면서 온유했다. 숲의 너그러운 향을 들이마시면,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우려낸 사골 국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하게 불렀다.


흙과 풀로 뒤덮인 땅은 아스팔트처럼 발을 밀어내지 않았고, 걷는 두 발을 땅으로 살며시 끌어당겼다. 특히 마르기 직전의 흙은 물과 적절히 버무려져서 쿠션처럼 푹신푹신했고, 걷는 마음도 덩달아 푹신해졌다.


바람에 사각거리는 나무 가지와 보이지 않지만 여기저기서 서로 음색을 뽐내는 새들. 숲에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들을 게 많았다. 이런 숲에서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은 불필요한 사치처럼 느껴졌다. 아무 말하지 않고 걸어도, 함께 있는 사람이 느껴졌다.


하늘을 뚫을 거 같은 고층 빌딩을 봐도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이 오지 않았지만, 구름을 닿을 거 같은 커다란 나무를 올려다보면 경외감이 느껴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오랜 세월을 겪은 나무들이 앞으로도 나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이 지구에 남아 있을 거라는 사실은 나를 안심시켰다.




햇살이 숲 사이로 고르지 않게 들어오면, 빛과 그림자가 지그재그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구름과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숲은 반짝이기도 했고, 우수에 잠기기도 했다.


걷다 보면 중간중간 자전거가 지나간 흔적이 땅에 직선으로 남겨져 있는 게 보였다. 자전거를 타지 않아서 그러겠지만, 숲을 마치 고속도로처럼 순식간에 뚫고 지나가는 산악용 자전거에 걷다가 종종 놀라곤 한다.


특히 뒤에서 자전거가 예고 없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돌진하면, 남편에게 ‘조심해’를 외치며 나 역시 재빨리 숲 길가로 옮겨 서곤 하는데,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이들은 벌써 우리 앞 저만치에서 달려가고 있다.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거나 강한 바람에 꺾여 추락한 가지들도, 본래 속한 나무의 뿌리에서 멀리 가지는 못한 채 땅 위에 조용히 누워있다. 가끔은 이런 가지들 중 하나가 나의 세 번째 다리가 돼주기도 한다.

숲이라고 평지만 있는 건 아니다. 종종 완만한 경사가 나와서 단조로움을 막아준다. 하지만 숨이 조금 찬다 싶으면 다시 길로 돌아오고, 봄 원피스보다 더 화려한 노랑나비가 눈 앞에서 소리 없이 날개 짓을 한다.


마음이 숲의 나무처럼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지 않아, 견디는 능력이 부족하고 예민한 나에게, 숲은 다시 태아로 돌아가 엄마의 자궁 안에 있는 느낌이 들게 하는 얼마 안 되는 곳이다.


언젠가 우리 집이라는 걸 갖게 된다면 숲 안에 있거나 숲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매번 숲에 갈 때마다 남편과 꿈꾸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비 온 뒤 걸을 수 있는 '비밀의 숲' 이 언제나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 행복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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