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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May 10. 2019

추억의 러브레터

십오 년 만에 중학교 단짝을 만나게 되었다. 오랫동안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 친구가 브런치를 통해 나를 찾아 연락이 닿은 것이다. 그러다 마침 이번에 나와 남편이 한국에 잠시 들어오게 되면서 스무 살 이후로 처음 얼굴을 보게 되었다. 과거의 추억을 하나씩 꺼내서 회상하던 중 친구가 말했다.


“우리 집에 예전에 받은 엽서나 편지들을 한데 모아둔 상자가 있거든.”


나는 거기에 내가 준 편지나 카드가 있었다는 말인가 내심 기대하며 대답했다.


"그래?"


“중학교 때 네가 좋아했던 *** 오빠 기억나?”


희미한 기억들이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올라왔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아니 나도 까맣게 잊은 사람을 얘는 어떻게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지 하며 속으로 내심 놀래고 있는데, 친구는 더 깜짝 놀랄 말을 하였다.


“네가 그 오빠한테 쓴 편지 중에, 세 통을 나한테 보관해 달라고 줬잖아.”


“내가?”


“응. 기억 안 나?”


“아니 전혀 안 나는데..”


언제 그런 러브레터를 이 친구에게 맡아달라고 했지. 나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머지 편지는 다 태울 테니까, 그중에 세 통만 내가 갖고 있어 달라고. ”


“아 진짜?”


“어. 네가 나한테 맡겼던 편지 세 통이 우리 집 그 상자 안에 있거든.”





편지를 친구한테 맡겼다는 건 여전히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지만, 태운다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생생하게 기억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부치지 못한 편지들을 동생과 몰래 방에서 태우기 시작하다가, 적당히 탔다고 생각할 때쯤 불을 끄려고 물을 부었다. 그때 불길이 순식간에 우리 키만큼 올라오더니,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고 당황하다, 본능적으로 내가 옆에 있던 담요를 집어서 내리쳤다. 어린 나이에도 생존 본능이 빠르게 작동했던 것이다. 불은 다행히도 ‘꽝’ 소리와 함께 바로 꺼졌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엄마는 방안에 가득 찬 연기와 까맣게 탄 방바닥을 보고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뭐 한 거야?”


엄마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할 순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쓴 편지를, 그 사람을 잊으려고 태우려다 집도 날리고 나뿐만 아니라 동생의 생명까지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고 말이다. 당시 중학교 이학년이었다. 다른 말로 둘러댔고, 당연히 한참 혼이 났다. 죄 없는 동생까지 덩달아 말이다. 편지들은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 잊혀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타올랐던 격렬하고, 철없던 그래서 아름답기도 했던 사춘기 시절의 불같은(?) 사랑이었다.


정말 불을 낼 뻔해서 문제였지만.





편지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집을 몽땅 태워먹을 뻔했던 그 사건은 동생과 아직도 가끔 이야기하곤 했다. 불이 올라오던 순간 오리털 이불이 아닌, 그 밑에 있던 담요를 집어 들은 것을 두고두고 다행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나와 동생은 불을 누구보다 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편지를 태우기 전에, 그 당시 늘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에게 편지 중 일부를 주면서 나 대신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을. 친구는 그 이후로도 이십 년 가까이, 그리고 우리가 연락이 끊긴 십오 년의 세월 동안, 그 편지들을 몇 번의 이사에도 불구하고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임캡슐처럼 말이다.   


이제 나에게 그 편지들은 더 이상 추억 이외의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타임캡슐을 열어 편지가 아닌 소중한 친구를 다시 되찾은 거 같아 행복했다. 만약, 그때 열네 살의 나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불같은 사랑은 얼마 안 있어 결국 꺼지지만,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꺼지지 않는 것은 우정이라고.


친구를 잊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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