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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u letar Dec 24. 2022

80번 소개팅의 전말

8월의 크리스마스와 세 번의 반전 (1)

 하나 씨는 왜 그렇게 눈깔을 희번덕대세요?


 나름대로 잘 굴러가고 있던 우리 사이는 어느 날 갑자기 전화로 툭, 뱉은. 그의 단순하고도 강렬한 문장으로 박살이 나버렸다.


 때는 집 앞 공원이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있던 초여름이었다. 아버지 지인의 직장 동료의 아들이라는. 가깝다면 가까운, 멀다면 너무나 먼. 어떤 사람이라는 설명을 들을 길이 없던 그를 소개해준다고 했을 때, 어딘지 걸쩍지근했지만. 여전히 혼자인 내 미래는 더욱 걸쩍지근했으므로. 번호를 허락했다. 상대방이 내 동네로 와준다고 해서 나는 약속 이틀 전, 룸이 있는 와규 집을 예약했다. 


 18개월 동안 서른 번의 소개팅을 했다. 사실 30번째를 넘긴 이후부터는 일일이 세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후 24개월의 시간이 더 흘렀고 비슷한 주기로 계속해서 소개팅을 해왔으니- 어림잡아 80명은 되지 싶다. 그 정도로 많은 소개팅을 하면 어떤 기분이 드냐고들 물어보는데, 어떠긴. 아무렇지도 않다. 닳고 닳아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데 거기엔 생기가 전혀 없다. 무표정한 얼굴로 회사에 출근하는 여러분의 얼굴을 떠올려 보라. 그것과 별 다를 게 없다. 심지어 소개팅은, 나간다고 월급을 주지도 않는다.


 약속 당일. 리넨 소재의 반팔 원피스를 입었다. 이것 역시 특별할 게 없다. 그저 작업복일 뿐이다. 허리선을 잡아주고 적당히 굴곡을 살려주는 핏이라 몸매가 좋아 보이고, 스킨 컬러라 봄 웜톤인 나와 찰떡이기 때문에 이것을 여름용 작업복으로 선정했다. 원피스는 찰떡이나, 그간의 경험상 사람은 찰떡인 경우가 극히 드물기에 큰 기대 없이 나갔다.


  식당에 먼저 도착해 룸에 들어가 앉았다. 고기 굽는 냄새가 나고 벽 너머 희미하게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 간헐적으로 호탕하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헤링본 무늬가 끝이 없이 이어진 허연 벽을 보면서 멍 때리기 시작했다. 기대하는 바가 없어서인지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쫙 펴고 있던 허리가 굽었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아 손목시계를 보니 약속시간보다 20분이나 더 지나 있었다. 


예전엔 상대방이 약속시간에 늦으면 화가 났지만 요즘엔 좀처럼 그렇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지금이 영화 '접속'의 배경인 90년대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그 시절엔 휴대전화도 없었으니, 남자는 교통 체증으로 늦어지고 사정을 모르는 여자는 고기 냄새만 뒤집어쓰다가 그만 지쳐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거다. 그렇게, 손쉽게 인연이 아닌 사람들로 끝낼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상대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 왔어요. 다 왔어. 밑에 주차장이에요. 아 주말이라 너무 밀렸네요. 빨리 올리갈 께요.


 이 날씨에 잠바? 남자는 뛰어올라왔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더운 날씨에 꽤 두께감이 있는 검은색 항공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물을 한 번 더 따라 마시는데, 목에서 땀이 쪼로록 흘러 카라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여기가 원래 자주 오던 곳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실제론 점퍼를 비롯해 그의 너무나도 동그란 얼굴에 놀라고 있었다. 연신 땀을 흘리면서도 그 잠바떼기를 벗지 않았는데, 터질 듯이 정확하게 똥글빡한 얼굴 때문에 더 더워 보였다. 얼굴이 둥글다는 게 살이 쪄서 그런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평범한 체형이었으나 얼굴은 마치 도화지에 냄비 뚜껑을 대고 그린 것처럼 정확하게 동그랬다. 내가 그 동그라미에 심취해있는 동안 그는 오늘 나를 만나지 못했으면 오랜만에 이 동네에 사는 친구를 만났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곤 묻지도 않았는데 그 친구의 사사건건에 대해서 쭉 나열했다. 나는 텔러이기보단 리스너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적절한 타이밍에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한 길이의 답변을 했다. 다행히도 그는 고기를 잘 구웠고 이후에 나온 식사도 맛이 괜찮았다. 


좋은 음식과 좋은 대화(그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감정을 끌어내기에 충분했으므로, 동그라미는 내게 꽤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간 카페에서 그가 나에게 다음번엔 언제 시간이 되냐고 물었으니까. 


 나는 동그라미를 세 번 더 만나면서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다니는 직장은 어떤 회사이고 어떤 일을 맡고 있는지. 동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아버지는 2년 전에 돌아가셨으며 당시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장례식장엔 누가 왔었는지. 형제 없이 자라면서 일방적인 소통에 익숙해졌던 것. 어머님은 그가 어떤 인생을 살길 바라고 계시는지, 또 본인 자신은 어떤 결혼생활을 원하는지 등. 동그라미는 꽤 자신감이 넘쳤는데 아직 마흔이 채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수도권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는 부분에서 특히 그랬다. 사람들이 내게 속물이라 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이, 그 부분은 내게 있어서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집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시작점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 그로 인해 달라질 생활수준. 추후 출산에 있어서도- 프리랜서인 내가 얼마나 일을 잡아야 하는지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침을 튀어가며 자신감이 넘치던 그가 돌연 의기소침한 손짓으로 커피잔 속 빨대를 휘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하나 씨가 싫어할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요. 저 3교대인데 괜찮아요? 여자들이 다들 3교대라고 하면 싫어하더라고요. 한 달에 한 번씩 출근시간이 바뀌어요. 1년에 4개월은 남들 잘 때 일하니까 좀 꺼려하더라고요.


 그런가. 실질적으로 걸리는 문제는 따로 있는데. 난 당신의 그 깜장 잠바 때문에 대화에 집중이 안돼. 우리가 만난 한 달 동안 그는 이너로 입은 유치한 프린트의 티셔츠만 바꾸어가며, 매미까지 울어재끼는 마당에, 여전히 그놈의 검은색 점퍼를 벗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히 그의 달력도 8 월일 텐데. 도대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뭘까. 큰 흉터가 있는 걸까·······? 혹시 용가리 문신이라도 있는 건가·······? 것도 아니라면 자신을 해한 흔적이라도·······? 내가 그의 검은 소매 속을 상상하며 수많은 가능성의 문을 열고 닫는 동안,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며 조신하게 모은 손으로 커피잔을 붙들고 있었다. 나는 얼른 생각에서 빠져나와 그에게 대답했다. 3교대라는 근무조건이 우리가 서로 알아가고 좋은 마음으로 만나는 데에 크게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이다. 


실제로 내 생각이 그랬다. 특히 우리처럼 결혼을 전제로 소개팅을 한 사람들은 그보다 중요한 게 훨씬 많은데. 이를테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비슷한지. 함께 할 만한 취미가 있는지.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대화할 것인지. 힘들고,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더라도 이인삼각 경기와 같은 이 인생을 함께, 끈기 있게 해져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곳이 비슷한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동그라미의 더욱 동그란 눈에, 한줄기의 빛이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기세에 힘을 입어, 사실은 자신에게 한 가지의 비밀이 더 있다고 말했다. 나는 비밀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두려움에 떠밀리어, 그게 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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