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과 소송을 한 나, 다시 방송할 수 있을까?
변호사는 됐는데 여전히 방송이 하고 싶어
본캐와 부캐의 뜻을 찾아본 적이 있어. 'ㅂㅗㄴㅋㅐ ㅂㅜㅋㅐ' 생소한 글자들을 포털 검색창에 입력하고 있는 내가 꽤 '옛날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어감이 강렬해서 뇌리에 꽂혔달까? 암튼 찾아볼 수밖에 없었어.
내 본캐와 부캐는 무엇일까? 어쩌다 보니 기자, 아나운서란 직업으로 10년을 방송국에서 일했고 올해 4월,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라는 3번째 직업을 갖게 되었어. 수습 변호사라서 아직 변호사의 삶을 제대로 겪어보지 못하긴 했지만... 요즘의 나는 방송이 다시 하고 싶어서 고민이야.
"그럼 다시 방송하면 되는 거 아냐? 배부른 소리 하네! "라며 무안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내가 방송국과 3년 반이나 퇴직금 소송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꾸 위축돼.
2018년 고용노동부 국정감사 참고인으로 출석해 7분 정도 방송국이 비정규직들에게 하는 갑질에 대해 발언한 적이 있어. "이 바닥이 꽤 좁다." "이러면 너, 다른 데 가서 방송할 수 없을 거다"라는 말들. 방송국의 협박이나 회유? 살짝 언급하긴 했는데, 실제로 그런 두려움이 있어. 방송을 하는 사람들, 하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전국적으로 지상파 방송국에서 일하는 아나운서는 그 인원이 많지 않거든. 대형 방송사를 제외하고 지역 지상파 방송국들은 적게는 2,3명 있는 곳도 있고 내가 있던 지상파 방송국은 남자 2, 여자 4 이렇게 아나운서가 총 6명이었어. 그리고 힘은 쪽수에서 나오는 거 알지? 아나운서는 PD나 기자 직역에 비해 방송국 내부에서 힘이 별로 없어. 실제로 아나운서는 프로그램 선택권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PD가 선택하거나 자체 오디션을 통해 '윗분'들이 뽑아. 그러다 보니 눈밖에 나는 선택을 하기 더 어렵고... 후폭풍이 두려워 부당한 일을 겪어도 맞서 싸울 생각을 하기 쉽지 않아. '하고 싶은 방송을 영원히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야. 나는 방송국을 그만두고 로스쿨에 왔으니, 그렇게 발언할 수 있었던 거고... 방송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진짜 쉽지 않아.
그런데, 그랬던 내가 여전히 방송이 하고 싶으니 나도 이런 내가 참 웃겨. 로스쿨에 들어와서 힘들었던 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행복하게 방송을 하는 여러 다른 방송인들의 모습을 인스타그램에서 보는 거'였어. '방송을 할 때 빛났던 내 모습을 사진으로 들여다보는 것'도...
정규직 기자를 그만두고 다시 도전했을 정도로 나에게는 소중한 '평생의 꿈'이었거든. 무려 3명의 아나운서에게 퇴직금을 안 주려고 소송까지 벌인 '그 방송국'이 싫었던 거지, '방송'이 싫어서 떠난 게 아니어서 더 그랬나봐. 그래서 로스쿨 재학중에는 친한 방송인들이 올리는 근황을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기도 했어. 나는 이미 그 바닥을 뜬 사람이고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거든.
정체성? 그게 뭘까? 딱히 나를 한 단어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인생 항로를 그려가고 있는 이 시점에, 나를 정의 내릴 단어가 없다면 그냥 새로운 정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방송, 행사, 강연, 교육. '과연 누가... 이런 기회를 나에게 줄 까?'라는 생각으로 움츠러들 때마다 '내가 그 기회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하려고 해.
정규직 기자를 포기하고 또다시 아나운서 지망생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28살의 나', 방송국을 다니면서 로스쿨 진학을 결심했던 '36살의 나'
실패할지 모르는 도전에 지지해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냥 후회 없이 하는 데까지 해보자. 절박했던 그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던 그때보다는 행복한 요즘이라고... 결국 하고 싶은 방송을 다시는 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닌지... 자꾸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나를 달래.
가장 큰 복수는 '내가 잘 사는 거'랬어. 내 앞길을 막고 싶어 하는 방송국 놈들에게 보란 듯이 잘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나, 정말 할 수 있을까?
수습기간이 1개월 19일 남았지만 요즘 놀고 있는 수습 변호사의 고민 이야기.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