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 02 - 사랑은 무언가의 책임

From 1919 to 2022

by 시드니


“정말 며칠을 고민했어요. 그런데 태길 씨를 부르고 말았네요. 엄마에게 알릴 순 없었어요. 딸에게 말할 수는 더 없었어요. 숙희에게는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드니까 남는 게 태길 씨 밖에 없더군요. 그렇다고 태길 씨에게 어려운 것을 부탁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며칠 뒤면 난 큰 수술을 받아야 해요. 이제 더는 태길 씨에게 내 몸을 보여줄 수 없게 되는 큰 흉터가 남을 거예요. 그러고도 살 수 있을지는 가봐야 알아요. 어렸을 적부터 아빠를 봐서 알아요, 의사들이 그렇게 말하면 많이 안 좋은 거예요. 또 잘 된다고 해도 난 아주 긴 싸움을 해야 해요. 사실 지금은 너무 겁나요”


“하지만 난 혼자 있는 엄마가 있고, 아직 어린 딸이 있어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 밖에는 없죠. 그동안 태길 씨가 있어서 참 좋았어요. 처음엔 하루만 딱 하루만 좋자 그랬는데, 그게 이틀이 되고 며칠이 되더니 일상이 되더군요. 조금만 더 젊고 예뻐 보이고 싶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이제 난 이전에 알던 여자가 아닐 거예요. 당신에게 보일 수 없는 흉터와 상처가 남을 거고, 난 그걸 당신에게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사람 욕심이란 게 참 무섭네요. 태길 씨! 나 수술할 때까지만 옆에 있어줘요. 눈을 떴는데 혼자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염치없지만 그 뒤에는 날 잊어줘요.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살아남아서 당신 앞에 설 수 있으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찾을게요. 그렇다고 기다려 달라는 건 아니에요. 인연이 남았으면 그때 다시 봐요. 그래도 지난 정이 있으니 수술받을 때까지만 내 곁에 있어주세요. 그러면 난 더 이상 태길 씨에게 바라는 게 없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다 말한 겁니까?”


짧은 침묵이 지나고 태길이 지수의 눈을 무섭게 바라보며 말했다.


“네 ~ ”


지수가 태길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답했다.


“지수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너무 무책임합니다. 그래도 우리 사랑했잖아요. 물론 서로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래도 사랑은 했잖아요. 도대체 지수 씨의 사랑은 뭡니까?”


“내 사랑은 책임지는 겁니다. 지수 씨를 사랑하는 만큼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지수 씨에게 더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던 거고요. 그렇게 지수 씨를 지킨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뭐라고요? 뭐 수술 때까지만 있고 그 뒤에는 알아서 떠나고 나중에 인연이 되면 다시 보자고요? 도대체 지수 씨에게 난 뭡니까?”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지수 씨에게 종기의 자리를 달라고 말한 적 있습니까. 이제까지 지수 씨가 주는 만큼만 만족하고 지내왔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아프게 합니까”


“우선! 난 그 말도 안 되는 지수 씨의 부탁인지 통고인지는 들어줄 수 없고요. 내가 싫어서 미워서 가라고 하면 떠나 주겠습니다. 처음부터 내가 약속한 거잖아요. 하지만 내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사를 다투고 있는데 떠나라는 건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그리고 지수 씨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게 무슨 국가기밀입니까. 왜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고, 딸에게 알릴 수 없고, 하나뿐이 없는 친구에게도 말 못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내가 알았으니 지금부터는 내 맘대로 합니다. 뭐 ~ 몸에 상처가 흉해서 보여줄 수 없다고요? 우리가 아닌 말로 같이 지낸 밤이 며칠인데 그런 소릴 해요. 내가 지수 씨 몸이 날씬해서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아니고요! 지금 지수 씨 몸이 청춘도 아니거든요. 내가 지수 씨를 알고 나서 이렇게 화가 난 건 처음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수 씨에게 언성을 높인 적도 없는 것 같아요”


“죽던 살던 난 지수 씨 떠나지 않을 테니까. 죽어서 떠나던 싫다고 쫓아내 던 지수 씨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지수 씨도 나 책임지세요. 조금이라도 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조금이라도 날 책임지세요. 당신이 날 이렇게 쫓아낼 순 없습니다”


“나 ~ 이 방에서 나가면 지수 씨 어머니도 뵐 거구요. 숙희 씨에게도 알릴 겁니다. 이게 무슨 죄를 지은 겁니까. 왜 숨겨요. 그리고 누가 죽는데요. 내가 총으로 의사를 협박해서라도 지수 씨 살립니다.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 같아요? 맨날 바보처럼 지수 씨만 좋다 하니까. 지수 씨 눈엔 진짜 내가 바보처럼 보이나 봅니다”


지수는 이렇게 흥분한 태길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말을 쏟아 내는 것도 본 일이 없었다. 태길이 너무 무섭 뜨고 흥분해서 격해지니 지수의 눈이 겁먹은 강아지 마냥 되었다. 지수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니 태길이 더 겁을 먹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지수 씨가 너무했어요”


“아무튼 이제부터는 내가 지수 씨를 보호합니다. 지수 씨는 이 시간 이후 수술만 잘 받도록 준비하면 돼요. 이 일에 지수 씨와 나 사이에는 어떠한 협의도 없습니다. 내가 병원로비에 들어 눕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지수 씨한테 쫓겨나지는 않을 겁니다"


"난 사랑을 그렇게 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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